김기덕 감독의 12번째 작품이자 칸 영화제 비경쟁부문 개막작으로 선정된 ‘활’은, 김기덕의 다른 영화가 그렇듯이 그의 상상공간 안에서 재구축 된 원형질적 세계를 반복하면서 이전의 작품들과 조금씩 차이를 두고 있다. ‘활’은 세계무대에 김기덕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린 베니스 영화제 경쟁작 ‘섬’과 역시 베니스에서 지난해 감독상을 받은 ‘빈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반복과 차이야말로 김기덕의 영화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이다.
김기덕의 상상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형질적 물질은, 물이다. 김기덕은 물 곁에 있을 때 비로소 힘을 얻는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인 ‘섬’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모두 물 위에서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생각해보라. ‘활’ 역시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단 한 번도 뭍을 밟지 않는다. 영화 전체가 물 위에 떠 있는 카메라 위에서 찍혀져 있다.
바다 위에 정박해 있는 낡은 어선에는 노인과 어린 소녀가 살고 있다. 소녀는 노인의 딸, 혹은 소녀도 아니다. 소녀는 7살 때쯤 이 배로 와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배를 떠난 적이 없다. 노인은 소녀가 결혼해도 되는 나이인 17살 생일날, 소녀와 결혼식을 올리려고 달력에 표시를 하고 있다. 낚시꾼들을 이 배로 데리고 오는 작은 배가 하나 더 있다. 큰 배는 정박해서 움직이지 않지만 작은 배는 이 배와 바깥 세계를 연결해준다.
노인은 가끔 낚시꾼들이 원하면 활점을 쳐준다. 배의 난간에 매달린 그네 위에 소녀가 앉아서 흔들거리면 바다 위의 작은 배 위에 서서 노인은 소녀를 향하여 활을 쏜다. 정확하게는 소녀가 아니라 소녀 등 뒤의 배 난간에 그려진 보살 탱화를 향하여 활을 쏜다. 그러나 정확하게 쏘지 못하면 화살은 소녀의 몸을 꿰뚫을 수도 있다. 3대의 화살을 쏜 뒤 소녀는 그것이 박힌 위치를 파악해서 노인에게 점괘를 들려준다. 점을 치고 나면 노인은 뱃머리에 올라 활을 악기로 켠다. 구슬픈 해금 소리가 바다 위에 울려퍼진다. 그러나 낚시꾼들이 소녀를 희롱하면 노인이 쏜 화살이 가차없이 날라든다.
어느 날 아름다운 청년이 낚시배에 타면서 소녀와 시선을 나눈다. 노인은 불안하다. 소녀가 떠나갈 것만 같다. 소녀가 잠든 사이 몰래 달력에 빨간 선을 그으며 결혼식 날짜를 하루라도 먼저 하려고 한다. 소녀는 노인을 벗어나려고 한다. ‘활’의 후반부는 삼각관계에 의한 공식이 상투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활’이 범속한 삼각관계의 신파적 코드나 상투적 이미지에 함몰되지 않는 건강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은 김기덕의 절제된 상상력 때문이다. 국제영화제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김기덕의 영화에는 대사가 거의 줄어들고 있다. 대사는 최소한으로 생략되고 이미지의 힘은 무한대로 증폭된다. 가령 그의 포항 바닷가 새장여인숙에 살고 있는 주인집 여대생과 창녀의 관계를 그린 ‘파란대문’의 한 장면, 바다 위에 설치된 높은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배의 망루 위에 앉아 있는 소녀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활점을 칠 때 흔들리는 그네에 소녀가 앉아 있는 것은 이미 ‘섬’에서 인형으로 등장한 바 있다. 정박해 있던 배가 움직이는 것은 ‘섬’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이렇게 김기덕의 ‘활’은 지금까지 그의 영화세계에 등장한 다양한 이미지들을 반복하며 변주를 해서 차이를 두고 있다. ‘활’의 마지막 부분은,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이 신화적 세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논리와 이성을 뛰어넘어서만이 이해되는 세계이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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