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간데 없이 펼쳐진 드넓은 들녘.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김제. 과장할 것도 없이 김제 들판에 서면 앞뒤 좌우가 온통 논이다. 언덕이나 산도 없이 평평하게 펼쳐진 들녘은 인간의 시야가 닿는 지평선을 넘어 계속 이어진다. 한창 누렇게 익어 가는 가을 논이 더없이 보기 좋다. 도로변으로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져 가을의 정취를 한껏 돋운다.
하늘이 파랗게 높아지며 한창 가을 맛이 시작되던 지난달 27일. 아리랑문학관에서 조정래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아리랑의 배경을 찾아가는 아리랑 문학기행이 있었다. 아리랑 문학관은 소설 아리랑의 모든 것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문학관이자 작가 조정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문학관은 지난 5월, 아리랑의 무대인 징게맹갱 외에밋들(김제만경 너른들)에 문을 열었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폐교된 초등학교에 문학관을 짓고, 교실이 있던 2층 건물은 리모델링을 통해 작가들을 위한 작업실로 꾸몄다.
1층 현관을 지나 첫 번째 전시실에서는 사람 키보다 높은 원고더미 앞에 서게 된다. 2만장에 이르는 아리랑 육필원고가 탑을 이룬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식민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유난히 배경이 넓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만주, 연해주, 중국 등지로 취재여행을 하던 당시에 사용했던 선글라스, 모자, 가방, 취재노트 등을 전시해 놓았다. 세심한 메모와 그림까지 곁들인 취재노트는 집필하는 데 기본 자료가 되었다고. 아리랑을 집필하기까지 작가가 쏟은 땀과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어떤 메모지에는 200자 원고지 2만장에 들어갈 수 있는 글자 수를 계산해 놓은 것이 있는 데 조정래 선생은 “2만장에 글자를 써넣어도 일제에 희생된 우리 민족 400만명의 숫자에 미치지 못한다”며 희생자 한 명 한 명을 대신한다는 마음으로 집필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리랑은 지난 96년 프랑스 아르마땅 출판사와 출간 계약을 맺은 뒤 아리랑문학관이 개관할 즈음해서 전권이 완역돼 출판됐는 데, 아리랑 초판본과 함께 프랑스어판 12권이 나란히 전시돼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취재노트에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다. 한때 미대를 꿈꿨다는 작가의 미술 실력이 소설 집필에서도 큰 힘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층에는 작가의 소장품과 태백산맥 및 한강 전권, 신문 연재를 모아 둔 스크랩, 자화상을 비롯한 그림 등이 전시돼 있다. 2층 전망대에서는 징게맹갱 외에밋들이 내려다보인다.
김제 죽산면 일대의 토지를 사들여 커다란 농장을 만들었던 하시모토의 실제 농장 사무실 건물도 그대로 남아있다. 튼튼하게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내부에는 당시에 사용했던 책상, 시계 등이 있는 데 지금이라도 먼지만 털어 내면 사무실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 실제로 김제에는 하시모토라는 일본인이 거대 농장을 만들어 소작농들을 갈취했던 역사가 있고, 시에서는 이를 허물지 않고 유물로 보존해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으로 만든 것이다.
벽골제는 백제시대 때 만든 대규모 저수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일제가 조금이라도 땅을 늘리기 위해 저수지를 매워 논으로 만들었는 데, 지금은 제방과 수문 몇 개만 남아있다. 제방에서 올라서서 볼 때 멀리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낮은 산 아래까지가 저수지가 있던 자리라고 하니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 수 있다.
벽골제 광장에는 아리랑 문학시비가 서 있고, 주변에 수리민속 유물전시관, 우도농악관, 벽천미술관, 단야루 등이 있어 가족 나들이객의 발길이 잦다.
문학기행의 마지막은 심포 전망대. 만경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모습과 바다 건너편으로 군산이 바라보이는 바닷가 언덕 위에 세운 전망대다. 동쪽으로는 김제 평야, 서쪽으로는 바다, 북으로는 만경강과 군산, 남으로는 조그만 심포항이 조망된다. 김제평야에서 거둬들인 쌀을 군산항에서 싣고 일본으로 가져갔던 일제 시대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지점이자 한창 시끄러운 새만금 사업의 현장도 멀리 바라다 보인다.
<글·사진=김숙현 여행작가 pararang@empal.com)
◇찾아가는 길=호남고속도로 김제IC로 나가 김제 시내로 들어간다. 시내에서 29번 국도를 따라가면 벽골제에 이른다. 벽골제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오른편에 아리랑문학관이 보인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서김제IC로 나가서 좌회전하면 김제 시내로 이어지고, 벽골제를 지나 문학관에 이른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 개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아리랑문학관 (063)540-3934
◇지평선축제=벽골제 단야로 앞 광장에서 ‘김제 지평선 축제’가 5일까지 열린다. 가을걷이가 시작될 무렵에 열리는 이 축제는 우리네 고유의 건강한 농경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장이다. 전통음식 체험, 만경 들노래 시연, 벼베기 추수체험, 우마차 타기, 논두렁 걷기, 풍물 한마당, 연날리기 등 건전한 우리 놀이와 가을걷이를 몸소 체험할 수 있다. 시내 중심에서 축제장인 벽골제를 연결하는 무료 셔틀버스도 운행한다. 지평선축제기획단 (063)540-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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