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6월 9일.
하치오지(八王子)행 중앙선 기차 안.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아키라의 모친과 헤어진 에이지와 히로코가 에이지의 집이 있는 하치오지행 기차를 타고 나서 아쉬움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되뇌인 말이다. 요코다 도시오의 일이다. 아키라의 마지막 일기에 ‘내가 죽음을 내린’ 인간이라고 그를 지칭하지 않았던가? 후지사와상이 피스 담배를 즐겨 피던 요코다라는 사람이 아키라와의 사이를 멀게 한 장본인이라고 말했을 때 왜 그 생각을 떠올리고 더 묻지 못했던가? 병원을 나와 여기에 생각이 미친 에이지는 자신을 나무라며 몇번인가 아쉬움을 되뇌었던 것이다.
“그때 눈치를 챘어도 후지사와상에게 더 이상 물을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히로코는 에이지를 위로한다.
“그럴까…” 히로코의 위로에도 에이지의 얼굴이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요코다 도시오라는 이름이 영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아키라의 일기장과 후지사와상의 말이 있기 전부터도 뭔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어디서인가?
“아무래도 일기를 자세히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는 에이지를 히로코가 일깨운다.
“글쎄 말이야…”
“오늘 일기를 모두 우리집으로 가지고 가서 같이 읽읍시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처진 기운이 다시 난다. “그럴까?”하고 응대를 하고 그 즉시로 집에 가 간단히 짐을 싸 히로코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아키라의 일기를 핑계로 한 동거의 시작인 것이다.
1999년 6월 10일.
도쿄 닛보리(日暮里) 히로코의 아파트.
수돗물 소리에 눈을 뜬 에이지는 어안이 벙벙하다. 누운 채로 손을 휘저어 벗어놓은 안경을 쓰고서야 자신이 잠을 깬 곳이 히로코의 침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제 하치오지의 자신의 집에서 간단히 짐을 싸 아키라의 일기를 챙겨 들고 히로코의 아파트로 온 것이 늦은 시간이었다. 닛보리는 히로코의 가게가 있는 긴시초와 멀지 않은 곳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도쿄 동북부의 동네다. 짐을 풀고 나가 야키니쿠(불고기)에 맥주를 잔뜩 먹고 들어와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난 마당이다. 홀애비 생활이 길어져 아침에 싱크대의 수돗물 소리가 마냥 생소하고 상큼하다.
“오하이오.”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나간 에이지가 말을 붙이자 히로코도 수줍은 듯이 “오하이오.”라고 하는데 영 어색하다. 부부생활이라는 것과 결별한 지 오랜 된 두 중년남녀가 한집에서 아침을 맞는 새로운 의식인 셈이다.
“아침 준비 다 됐어요.” 어색함을 피하며 히로코가 식탁으로 주의를 끈다. 일본의 아침식사는 간단하다. 흰밥, 된장국, 연어구이, 구운 김, 그리고 야채절임(쓰케모노)이 전부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고시히카리 쌀로 지은 더운 밥을 입에 넣은 에이지는 오랫동안 접하지 못한 가정의 화목함에 당황스럽고 코끝이 찡하게 슬픔이 느껴진다.
“설거지는 내가”하고 나서 오랜만에 싱크대에 손을 넣자 “그러면 나는 곧 일기작업에”하고 히로코가 대꾸한다. 나이에 비해 장난스럽고 낙천적인 여자다.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오니 히로코가 엎드려 아키라의 일기에 몰두하고 있다. 엎드려 있는 히로코의 엉덩이가 퍼져 정욕을 불러일으킨다. 짓궂은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하는 순간 “에이지상!”하고 히로코가 힘을 넣어 부른다. 뭔가 발견한 모양이다.
“여기에 있네요!”
“뭐가?”
“요코다 도시오라는 인물에 대한 언급이.”
“그래?” 에이지는 놀라서 묻는다.
“그런 인물이라면 아키라상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만난 인물일거라고 추측하고 졸업 전후를 뒤져보다 우연히 눈에 띄었는데…”
“야! 히로코상, 대단한 추리력인데…”하며 에이지는 일기장으로 눈을 돌린다.
아키라의 일기
1969년 6월 28일.
무더운 날씨다. 저녁에 신주쿠에서 베트남전 반대 포크송 집회가 열리는데 비라도 올까봐 걱정이다. 어제 저녁 어머니로부터 받은 전화가 마음에 걸린다. 전전공사에 합격한 사람들에 대한 신원조회에 우리 집안이 조선계라는 것을 안 인사부장과 인사계장에 아버지가 손을 썼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요코다라는 인사계장이 왜 두번이나 집으로 찾아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눴을까? 성질이 급한 아버지가 안다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부모가 뇌물을 써야 한다는 이 현실이 너무 분하고 싫다. 나의 태생이 이렇게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사회에 나가는 것조차 싫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에리카에게 언제까지 속여야 할까? 그녀는 정의로운 여자다. 나도 그녀와 같은 정의로운 일본인이 되고 싶다.
아니 이럴 수가? 에이지는 이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아키라와 모친의 사이를 떼어놓은 문제의 인물이 본인도 입사할 당시의 인사계장이었다니. 그러고 보니 옛날에 그런 이름을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나기도 한다.
“어머… 이를 보니 아키라상은 학생시절부터 조선인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네요.” 히로코가 동정어린 놀라움을 표한다.
“흠… 그렇구만” 학창시절부터 알던 그 수많은 아키라에의 얼굴에서 전혀 처음 보는 새 얼굴이다.
우선 분명한 행동목표가 떠올랐다. 요코다 도시오라는 인물에 관해 알아보는 것이다. 아키라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이미 고인일 것이다. 에이지는 즉시 JTT 총무과장 스즈키에게 전화를 넣는다.
“스즈키입니다.”
“날세. 다나카야.”
“어, 선배님. 퇴사를 하셨다구요. 아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후배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상의는 이 사람아. 별볼일없는 사람이 조용하게 물러가는 거지. 실은 후지사와군 일을 좀 알아보기 위해 급히 퇴사를 해버렸어. 어쨌든 미안하네. 나중에 한잔 하세. 그리고 말이야, 내가 입사가 내정되던 해니까 1969년에 인사계장을 하던 요코다 도시오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히 좀 알아주게나. 이 사람이 아무래도 후지사와군의 자살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허, 그래요… 당시 전전공사의 인사계장과 현재 JTT 간부의 자살과 관련이 있다니 희한한 일이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아무튼 뭔가 나오면 전화 좀 주게나.”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히로코를 보니 아키라의 일기책들을 죽 늘어놓고 독서삼매에 빠져있다. 흠, 조수하나 톡톡히 걸렸는걸,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에이지상, 한국의 부산에 대해 좀 아세요?”하고 묻는다.
“부산이라면 내 가라오케 18번 중의 하나인 부산코에 가에레(돌아와요 부산항에)밖에 모르는데. 왜?”
“아키라상의 어린 시절 일기를 들춰보면 부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요. 이것 보세요. 고2 때 일기의 한 대목을. 무슨 옛날 신문기사 옮겨놓은 것 같지 않아요?”
조선에서 전신업무가 개시된 것은 조선정부가 일본정부의 도움으로 근대적인 통신제도의 수립을 위해 우정총국을 1884년 부산에 설치한 것에 비롯된다. 일본 체신성은 덴마크의 대북전신회사에 의뢰하여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에 해저전선을 부설하고 이해 2월 15일 부산에 전신국을 개설하여 전신업무를 개시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제국 체신성 전신국 부산분국으로서 조선 근대통신의 효시가 된다.
“야, 이거 점점 더 이야기가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걸…”
“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일기를 읽고 조사도 해야 될 것 같아요”하고 히로코가 큰일이라도 생긴 양 신이 나서 맞장구를 친다.
둘이 멍하니 쳐다보며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는데 전화가 울린다.
“모시모시.”
“선배님, 스즈키입니다. 아까 하신 질문인데, 인사과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요코다라는 인물은 실제로 과거 전전공사에 근무하던 사람인데 JTT 역사상 몇 안되는 미스터리 인물이랍니다.”
“미스터리라니?”
“그 사람은 증발했습니다.”
“증발?”
“네, 도쿄 본사에서 오사카로 출장을 간 후 행방불명되어 이십년도 더 지난 지금도 사건이 종결되지 않았답니다.”
“그게 언제야?”
“1973년입니다.”
roh@alum.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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