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미국 탓만 해서야

◆유성호부장 shyu@etnews.co.kr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의 억지가 갈수록 기승이다. 결정판은 단연 이라크 전쟁이다. 테러를, 아니 테러의 소지를 없애겠다는 미국의 강력하고 확고한 의지 앞에는 유엔(UN)도 속수무책이다. 국민의 반전여론에 시달리면서도 각국 정부로 하여금 이라크전 찬성이나 파병까지 이끌어내는 미국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한국도 우여곡절 끝에 지난 2일 마침내 파병안을 국회통과시켰다. 의원들은 낙선의 위험을 무릅쓰고 국익을 위해 찬성표를 던졌다.

 우연인지 이날 새벽 미 상무부는 한국의 하이닉스반도체에 무려 57%에 달하는 상계관세를 부과했다. 어디 이뿐인가. 무디스 등 신용평가사들은 파병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한국의 신용등급을 낮추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동맹의 의리로 파병하겠다는 한국의 의지가 미국의 전방위 압력에 굴복한 형국으로 비친 꼴이다. 모양새가 어찌됐던 이번 파병결의로 북핵문제가 원만히 해결된다면 다행이다. 오는 7월께 있을 반도체 상계관세 최종판정도 유리하게 내려질 것이라는 기대도 국민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파병이 결의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무선인터넷 플랫폼인 위피(WIPI)에 대해 통신 301조 감시대상 국가에 포함시켰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위피가 무역장벽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미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는 ‘스페셜 301조‘의 감사대상국에 들어있다. 이 상태에서 다시 통신분야 감시리스트에까지 들어가는 이중의 제재를 받게 됐다.

 미 통상대표부(USTR)는 앞으로 한국을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해 1년 동안 협상을 벌이게 되며 협상이 결렬될 경우 한국의 대미수출품 가운데 한 품목을 무작위로 골라 100%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초강대국 미국에 형제의 우의를 기대했던 게 애초부터 잘못인지 모르겠다.

 미국은 전략지역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듯하다. 이라크와는 전쟁을, 한국과는 통상전쟁을 말이다. 핵문제로 속을 썩이는 북한과 전쟁을 치를지도 모르기 때문에 작은 것은 무조건 양보하라는 고도의 전략이 깔려 있지 않은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미국의 억지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경제전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이런 일을 한두번 겪은 것도 아니다. 강자의 힘과 논리를 뛰어넘는 약자의 생존전략이 필요한 때다.

 문제는 빌미다. 억지는 대부분 무심코 저지른 실수에서 비롯된다. 북핵사태는 우리의 뜻대로 안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손 치자. 하지만 하이닉스나 위피 문제는 그렇지 않다. 미국은 은행권의 하이닉스 지원금을 정부 지원으로 간주했다. 우리로서는 억울하지만 관치금융이 관행화된 실정을 미국이 눈감아 줄리 만무하다. 공적자금 지원이 정부의 의지였느냐 아니면 금융권이 자발적인 판단에 의해서냐는 미국 입장에서 중요하지 않다. 미국의 눈으로는 당연히 정부의 뜻이라고 판단할 수 있고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위피사태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정부의 인식부족 탓이 크다. 산업과 시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묶여왔다. 하물며 그 인프라인 통신은 오죽한가. 미국방식(CDMA)과 유럽방식(GSM)이 하나가 된 3세대가 이미 시작됐다. 우리만의 표준을 만들어 세계시장으로 뻗어가겠다는 발상은 좋았지만 일처리 방식은 좀 더 정교하고 치밀해야 했다. 시작부터 미국·중국의 CDMA 동지들을 규합해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했다면 이같은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억지를 부리는 미국도 밉지만 아직도 우물안 개구리 수준이란 지적을 받고 있는 우리 정부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