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인천항 하역창고에는 2650여대의 486급 PC가 열달째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한국정보화교육추진연합이 99년 4월 북한측으로부터 교육용 컴퓨터 지원을 공식 요청받고 지난해 3월부터 11월까지 전국 캠페인을 실시하여 모은 중고 컴퓨터들이다. 두 기관은 이 컴퓨터들을 북한 인민학교와 중국 옌볜과학기술대 및 조선족 소학교, 러시아 고려인협회 등에 지원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초 계획과 달리 일반인과 기업들로부터 모은 컴퓨터는 현재 연해주와 카자흐스탄 지역에만 보내졌을 뿐 북한의 인민학교에는 단 한대도 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캠페인 당시만해도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한 시기여서 중고 컴퓨터의 대북 반출에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염려했던 ‘바세나르 협약(The Wassenaar Arrangemet) ’이 발목을 잡고 말았다는 설명이다.
바세나르 협약은 한국과 미국 등 세계 33개국들로 하여금 컴퓨터 등 이중 용도 즉, 군사적으로 전용이 가능한 전략물자의 북한 수출을 금지하는 국제 협정이다. 33개 협약 당사국에서는 펜티엄급 이상 PC 및 마이크로프로세서 등을 이중 용도 물자로 풀이하는 것이 관례로 돼 있다. 여기에 우리 정부는 한술 더떠 486급 PC까지를 전략 물자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협약의 내용이 컴퓨터보내기 캠페인만을 무산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IT교류협력사업 전반의 확대를 가로막는 변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한의 IT기업들이 사업상 북한에 보내야 할 장비의 반출을 원천적으로 금지시키는 근거가 바로 바세나르 협약인 것이다.
캠페인에 참석했던 국내 대기업의 한 CEO는 “실질적으로 바세나르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중국·싱가포르·홍콩 등을 통해 펜티엄급 이상 PC와 서버컴퓨터가 상당수 북한에 들어가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이같은 제재는 한마디로 난센스”라고 표현했다. 실제 올 들어 두차례에 걸쳐 본지 특별기획취재팀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평양정보쎈터에는 펜티엄Ⅱ나 펜티엄Ⅲ급이 즐비했고 방마다 한두대씩 설치된 컴퓨터들은 스위칭 허브를 통해 랜(LAN)으로 연결돼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김일성종합대학 정보쎈터에는 ‘오라클8i’를 운영할 수 있는 윈도NT 기반 알파서버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 취임 후 소강상태에 남북관계가 빠져들었음에도 불구하고 IT 분야만큼은 예외인 것은 이 분야의 교류가 가장 현실적인 접근방법이라는 인식을 남북 모두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공유 의식의 기반에서 지난해 7월에는 중국 단둥에 남북합작 ‘코리아남북교역센터’가 설립됐고 올 2월에는 한글 정보처리 표준 분야에서도 공동안이 도출됐다. 이어 8월에는 남북 IT협력기관인 ‘하나프로그람센타’가 문을 열었다. 다음달 중에는 평양 근교에 남북합작 IT비즈니스타운이 착공될 예정이고 남북간 전자상거래가 가능한 합영회사도 설립된다고 한다. 학계에서도 남북이 공동으로 평양에 정보과학기술대학을 세워 IT인력 양성에 나서기로 했으며 포항공과대학이 처음으로 평양정보쎈터와 IT 분야에 대한 공동연구를 추진키로 했다. 그러나 이런 계획들은 기본적으로 남한에서 고가의 개발장비나 교육장비의 반출이 허용돼야만 가능한 일들이다.
하나프로그램센타가 압록강 접경 지대인 단둥에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세나르 협약때문이다. 이 센터는 북한이 바세나르 협약 제재대상국에서 해제되는 시점에서 평양이 신의주지역에 진입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사업기반이 확장이 여의치 못할뿐더러 세금과 임대료 등의 추가 비용 지출과 교통상의 불이익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에대해 서울에서 단둥에 파견나가 있는 한 관계자는 “압록강 철교를 통해 수시로 각종 물자가 북한으로 반입되고 있는데 단둥에 회사를 세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고 밝혔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김연철 수석연구원은 “바세나르 협약의 경우 테러지원국가에 대한 제재를 골자로 하고 있지만 사실상 냉전체재하에서 누렸던 헤게모니를 잃지 않기 위한 미국 중심의 몇몇 국가들이 만들어낸 결과물”라며 “무조건적인 협약 준수보다는 당사자인 남북 입장에서의 재해석 및 정부 차원의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북미관계 개선을 통해 북한이 테러지원국가 또는 불량국가 리스트에서 제외되 이에 따라 바세나르 협약 등 국제협약에 의한 북한 제재가 풀리는 것이다. 그러나 북미 상호간 입장조율이 단기간에 이뤄지기는 어려운 상태이고 보면 이 과정을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다.
우선은 민간차원에서 펜티엄급 컴퓨터가 이미 자동차와 같은 일상적 품목으로 생활 필수품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만큼 이의 자유로운 반출입을 허용하도록 정부에 촉구할 필요가 있다. 또 우리 정부는 남북교류는 국가간 수출입이 아닌 민족내부거래임을 국제무역질서에서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오늘의 국제 정세를 ‘과학기술과 정보화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IT를 강성대국 건설의 핵심’이라고 여기고 있다. 우리도 IT 선진국을 꿈꾸며 북한의 고급인력 활용과 북한 시장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 제도나 국제사회의 이목에 얽매여 놓쳐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기회다.
◆`바세나르 협약`이란
지난 94년 구사회주의국가들에 대한 전략물자 수출을 통제하기 위해 결성되었던 코콤(COCOM)이 해체 이후 이를 대체해서 북한과 이라크 등 소위 불량국가들에 대한 제재를 위해 새로이 등장한 국제협약이다.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와 같은 기존의 대량파괴무기 확산금지체제를 보완하여 재래식무기와 전략물자 및 기술의 수출을 통제하는게 주목적이다.
출범의 단초는 지난 90년대 초 동서간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코콤 회원국들간에 이 체제가 더이상 변화된 국제정치 환경에 적합한 기준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인식하에 시작됐다. 창립총회는 96년 4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됐으며 이때 미국·러시아·영국·일본·이탈리아 등 33개국이 회원국에 서명했다.
바세나르 협약에 의한 수출통제품목에는 크게 △이중 용도 품목 및 기술 △상용무기 등 두가지로 나뉜다. 이가운데 이중 용도 품목에는 제품의 기능에 따라 신소재·소재가공·전자·컴퓨터·통신장비·레이저 센서·항법장치·해양기술·추진장치 등 9가지 군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통제품목은 통제경험·기술향상 고려해 정기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으며 허가와 불허가에 판단은 회원국의 재량이다.
다만 북한·리비아·이라크·이란 등 테러 및 분쟁이 우려되는 4개국에 대한 수출에 대해서는 엄격한 규제가 이뤄지고 있다.
◆인터뷰:정재형 법무법인 한길 대표·변호사
정재형 법무법인 한길(Venture Law Group) 대표(변호사)는 대북 IT 전문가들의 모임인 통일IT포럼의 법제도 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정 변호사는 최근 남북 교류·협력 과정에 따른 법·제도 분석을 다룬 ‘벤처기업의 남북경협 성공전략’이라는 저서를 펴낸 바 있다.
―바세나르 협약의 법적 영향력은.
▲바세나르 협약은 ‘재래식 무기와 전략물자 및 기술’수출을 통제하기 위해 결성된 다국적 합의체다. 남한은 협약 회원국이므로 일정 품목에 대한 수출통제를 따를 의무가 있고 ‘대외무역법’과 ‘전략물자수출입공고’ 등을 통해 이 협약을 반영하고 있다.
―약 위반시 남한에게 주어지는 불이익은.
▲통제대상품목을 수출하거나 또는 수출을 거부하는 것은 각 회원국이 자체적인 책임하에 결정한다. 또 이를 어겼을 경우 어떤 불이익이 직접 발생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점은 크게 염려할 부분이 아니다.
―남북 IT 교류 확대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따른 우리의 역할은.
▲남한 입장에서 바세나르 협약과 같은 평화유지 관련조약을 어길 수는 없고 지키자니 수출제한품목이 너무 추상적인 규정이 많다. 또 대부분의 IT물품은 규제대상이어서 사실상 남북IT교류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는 6.15선언 이후에 이뤄진 남북한 투자보장합의서 등 4대 합의서 전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남북교류는 국가간 수출입이 아닌 ‘민족내부거래’임을 국제무역질서에서 인정받는 게 필요하다. 이를 통해 IT분야에서 가능한 많은 인적·물적 교류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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