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진 논설위원 jsuh@etnews.co.kr
IMF 이전 한국기업들의 경쟁력이 그룹 총수의 영향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얘기는 그리 새삼스런 말이 아니다. 이를테면 총수가 계열사 사장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면 억만금이 소요되는 기업 설립도 눈깜짝할 사이에 결정되며, 총수의 의지가 확인되면 은행 역시 별 조건 없이 엄청난 소요자금을 대출해 줬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기업 가운데 하나가 얼마 전 파산절차를 밟은 삼성자동차다. 삼성자동차는 세계 자동차업계가 살벌한 인수합병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서, 그러니까 세계에서 맨 마지막으로 탄생한 메이커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조그만 신규사업을 벌이려 해도 수많은 타당성 조사와 주주의 동의과정을 거쳐야 하는 외국기업들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사가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급부상하던 한국 회사들의 기업경쟁력 1위 항목을 강력한 오너십이라 분석했을까.
지난주에는 나라 안팎으로 큰 관심을 모았던 IMT2000사업자 선정 발표가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두 승자보다는 LG그룹과 하나로통신이라는 두 탈락기업이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독특한 상황판단 방식 때문이었다.
LG와 하나로통신은 우선 똑같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는 데도 IMT2000에 대한 향후 판세를 읽는 관점은 서로 달라 보였다. 심사결과에 대해 LG가 『(심사가 너무 불만스러운 나머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저항할 태세였던 반면 내년 초로 예정된 동기식 추가심사를 염두에 둔 하나로통신은 『(재도전을 위해) 겸허하게 수용한다』고 했다.
LG가 정부의 1동2비 정책을 바꿔서라도 비동기식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반면, 여러 가지 핸디캡을 안고 있었던 하나로통신은 어떻게 해서든 사업자 선정 가능성을 타진해 본 셈이다. 두 회사 모두 두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IMT2000사업에 대한 집념을 이런 식으로 서로 다르게 표출한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사업에 대한 두 회사의 접근방식은 오히려 비슷한 점이 훨씬 많다. LG는 IMT2000사업에 21세기 그룹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보고 대리인인 LG글로콤을 통해 전력투구해 왔다. 대규모 조직개편과 데이콤과 하나로통신 인수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뤄졌다. 초고속망사업이 주력인 하나로통신 역시 IMT2000사업자에 끼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음직하다. 그래서 수년째 적자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수백여 기업들을 설득해서 한국IMT2000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이 사업을 신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두 회사 모두 자본력이 넉넉지 못한 축에 속해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시장에서 LG는 항상 자금난에 시달린다는 루머에 파묻혀 지내야 했다. LG가 탈락하자, 그룹 계열사들의 주가가 오히려 반등 기미를 보인 것은 그 단적인 예다. 계열사들이 IMT2000사업에 대한 투자부담에서 벗어났다는 얘기다. 하나로통신 역시 영업손실이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적자폭은 올해 2000억원을 훌쩍 넘어설 전망이다. 공통점은 또 있다. 두 회사 모두 최고경영자 차원에서 IMT2000사업에 유난히도 집착해 왔다는 점이다. LG의 경우 직접 확인은 안되지만 그동안의 조직개편과 기업인수작업이 총수의 의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임은 물론이다. 하나로통신은 최고경영자가 컨소시엄 구성과 외자유치 그리고 대언론전략 등을 직접 챙겼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다. 탈락이 결정되고 나서는 최고경영자가 직접 사업추진
단장을 맡았을 정도다.
두 회사가 탈락한 것을 두고, 바로 이런 기업적인 특수성을 지적하는 견해가 의외로 많다고 한다. 이를테면 기업의 의사결정이나 운영방식이 시스템보다는 최고경영자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측면이 많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이 탈락의 직접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기업문화가 IMT2000사업 준비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스갯소리이긴 하지만 이번에 두 회사가 맞은 비극은 바로 사업자 심사항목에 최고경영자의 의지를 측정하는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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