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이었던가. 구본무 LG 회장이 계열사 사장들을 불러모은 자리였다. 그는 불쑥 중국산 휴대폰 얘기를 꺼냈다.
『중국에서 이제 휴대폰도 장난감처럼 나와요. 앞으로 중국 업체를 상대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당시 참석한 전자 계열사 사장들은 원가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시로 받아들였다. 생산기지를 동남아로 옮기는 것같은 그런 대책들 말이다.
오해였다. 구 회장은 보다 공격적인 것을 원했다.
구 회장의 바람이 뭔지 이제 뚜렷해졌다.
LG는 데이콤을 인수하더니 IMT2000사업을 신청, 낙점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96년 6월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을 따면서 시작한 LG의 행보는 초일류 거대 통신사업자의 길로 매진하고 있다.
사실 구본무 회장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LG는 자동차나 조선과 같은 중공업 없이 커왔다. 「락희금성」 시절부터 지금까지 주력은 전자와 화학이었다. 화학은 세계적인 화학업체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
그래도 전자만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
그런데 LG가 강점을 가진 가전산업이 이제 정보통신에 바통을 넘겨주고 있다. LG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주도권을 쥐지 않고서는 전자사업은 물론 그룹의 존망까지 위태로워진다.
여기까지는 객관적인 경영 환경분석에 따른 그룹 전략이다.
사업 참여에 항상 냉철한 분석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정서와 같은 감정도 개입한다.
LG의 정보통신사업 육성에는 뭔가 감정적인 게 작용하는 듯하다. 바로 「삼성 콤플렉스」다.
알게 모르게 LG는 삼성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전도 그랬고, 반도체도 그랬고 디스플레이 역시 그랬다.
삼성보다 먼저 시작했거나 같이 시작해도 늘 일등자리를 삼성에 빼앗겼다.
통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을 보자. 삼성은 불과 몇년도 안되는 기간에 세계 4위 업체로 도약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LG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조차 짜증이 났다. 국내 2위에도 불구, 세계 시장에서는 군소 업체의 자리를 면하지 못했다. 이제 시작한 중국업체와 같은 선상에 머물고 있다.
국내 업체 모두가 이랬다면 그래도 덜할 것이다. 하지만 라이벌 삼성은 저만치 멀리 가고 있다.
회장에 취임한 후 「초우량LG」와 「일등LG」를 내건 구본무 회장으로선 분통 터지는 일이다.
사람들은 듣기 좋으라고 「정도경영의 모범」이라고 LG를 치켜세우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돈많이 버는 게 최고 아닌가.
LG는 늘 2등만 차지하는 게 참을 수 없었다.
구두끈을 다시 매고 반격에 나섰다. 첫 판은 PCS사업권이었다. 보기좋게 삼성을 꺾었다. 그것도 삼성-현대의 연합군을 이겼다.
사업권을 따낸 96년 6월 10일 LG의 축하연에 사상 최대의 인파가 몰린 것은 그만큼 이번 승부의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4년 뒤. 그래도 일등 삼성, 이등 LG의 구도는 여전했다. 마치 대입시에서 고정되다시피 한 학교 서열과 다를 바 없었다.
이번에도 LG는 정보통신이라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빼들고 삼성에 들이밀었다. 「IMT2000」이다.
이번엔 삼성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삼성은 자국산업의 육성을 내세워 동기식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정보통신산업의 최대 맹주인 SK텔레콤도 찔금할 정도였으니 LG는 말할 나위도 없다.
몇개월에 걸친 논쟁 끝에 결국 LG와 SK는 비동기식을 관철시켰다.
LG로선 막말로 「동기」니 「비동기」니 기술표준이 중요하지 않았다. 동기식에 치우친 삼성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게 더 중요했다.
또 동기든 비동기든 몇년 뒤에는 의미가 없게 된다.
LG는 또 다른 비책도 내놓았다. 정보통신과 전자를 통합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삼성의 기술우위는 반도체에서 시스템에 이르는 시너지 효과인데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통합했다. 구본무 회장은 사실 계열사 사장들에게 중국 휴대폰을 말할 때부터 정보통신과 전자의 통합을 염두에 뒀다.
통합법인에 반도체사업이 없어 아쉬움은 남았으나 괘의치 않았다. 그 대가로 데이콤 인수를 비롯한 정보통신사업 진출의 길을 열지 않았던가.
LG는 이러한 대가성을 극구 부인했으나 세상은 그렇게 믿고 있다.
구본무 회장이 그리는 그림은 이렇다. 비동기식 IMT2000사업권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시장에도 진출한다.
뭐라 해도 중국은 LG의 아성이 아닌가. LG에 중국은 남다른 곳이다. 삼성보다도 먼저 중국에 진출했고 중국에 대한 지식과 유대감에서 LG를 따라갈 기업이 국내에는 없다.
전 이헌조 LG전자 회장뿐만 아니라 현 LG 경영진도 상당수가 중국통이다.
또 LG의 통신 단말기 및 시스템 기술은 비동기식에 강점을 갖고 있다. 「세계 최대의 이동통신시장인 중국을 장악해 삼성에 대역전극을 펼쳐 보이리라.」 구본무 회장의 속마음이다.
변수도 만만찮다. 중국이 동기로 갈지 비동기로 갈지 안개속이다.
현재로선 비동기로 갈 가능성이 높다. 한국 서비스업체들이 비동기 서비스를 펼치면 중국도 이를 따를 게 뻔하다. 중국 역시 이동통신서비스의 출발은 GSM이며 이 규격은 사실상 비동기를 전제로 한 것 아닌가.
다만 하나 걸리는 게 있다. 삼성이 특유의 계책을 써 중국시장 판도를 바꿔놓을지 모른다. 하지만 삼성은 서비스사업에 진출하지 않은 맹점이 있다.
그래도 혹시 몰라 LG는 중국의 차이나유니컴 등과 기술계약을 체결하는 한편 광둥성에 CDMA 통신장비 합작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구본무 회장은 선대 회장은 물론 자신의 숙원을 비로소 이룰 때가 다가왔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한국내 경쟁이 이처럼 「하드웨어적」이라면 중국과 일본 내부의 경쟁은 「소프트웨어적」이다.
두 나라에선 단말기나 통신장비에 대해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드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선 한국통신-SK텔레콤·LG텔레콤과 같은 통신서비스업체간 경쟁이 치열하다.
중국의 차이나텔레컴과 차이나유니컴은 자국내 통신산업의 주도권을 둘러싼 일대 회전을 앞두고 전력 보강에 여념이 없다.
제일 통신사업자인 차이나텔레컴은 이동전화과 위성전화 부문을 각각 맡을 차이나모바일(중국이동통신집단공사)과 차이나새틀라이트(중국위성)를 독립시켰다.
차이나모바일의 자본금은 무려 62억4000만달러다. 이 회사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GSM사업을 관장해 자국내 이동통신서비스산업을 주도할 계획이다.
차이나텔레컴과 달리 차이나유니컴(연합통신)은 유선에서 무선까지 모든 통신사업을 운영한다.
아무래도 규모와 인력이 취약하나 자국내 이업종과 해외 동종업종과의 연대를 통해 극복할 방침이다.
이 회사는 24개 주요도시에 193개 장거리 전화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관심사인 CDMA사업에도 곧 진출할 계획이다. 또 중국 인민해방군이 운영하는 그레이트월(세기이동통신공사)의 사업을 인계받아 힘을 배가시키고 있다.
서비스뿐만 아니다. 단말기와 장비에서도 경쟁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GSM 단말기 분야에서는 콩카·TCL·커지앤·하이얼·보다오 등이 1위 그룹에, 중싱통신·시아화·슈우신 등이 2위 그룹에 포진하여 무려 10여개사가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동통신장비 시장에서도 다탕·서우두·화웨이·중싱통신 등 10여개가가 경합중이다. 하지만 아직 이들 업체의 점유율은 미미해 당장은 경쟁보다는 상호 공조에 주력한다. 다탕 등의 장비업체들은 CDMA기술개발을 위해 미 퀄컴사와 관련 기술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
또 중국 단말기 및 장비업체들은 한국 등지의 업체와 개별적으로 전략적 제휴에 적극적이다.
우지추안 신식산업부 장관은 이같은 통신업체 구조조정과 경쟁체제를 통해 자국 통신산업의 체질을 개선하려 한다.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 외국의 거대 통신업체들이 물밀듯이 밀려들 게 뻔하다. 개방에 앞서 내부 경쟁체제를 도입해 경쟁력을 높이자는 게 중국정부의 복안이다.
일본의 경쟁구도는 다소 맥빠지는 양상이다. 사업자 부문에서 1위인 NTT도코모와 2위권인 J폰·셀룰러·IDO 등의 그룹간 격차가 너무 크다. 도코모의 가입자수는 2위인 J폰의 4배 수준이다.
단말기 분야도 마찬가지다. 마쓰시타와 NEC가 1위 그룹을 형성했으며 교세라·히타치·소니·켄우드·도시바·샤프 등이 2위권에 머문다.
세계적인 업체들이지만 단말기 분야에서는 노키아·에릭슨·모토로라 등은 물론 한국 업체에 비해서도 시장 점유율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이들 업체는 특유의 공조체제와 모바일 인터넷, 컬러디스플레이 등에서 앞선 기술을 내세워 한국업체에 빼앗긴 동북아 시장 주도권을 되찾는다는 전략이다.
특히 이 업체들은 도코모의 차세대 CDMA 서비스 조기실시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이동통신분야에서 일본, 중국에 비해 한국내 업체간 경쟁이 치열한 것은 역으로 그만큼 시장이 좁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업체들은 아직 서비스와 단말기 경쟁력이 낮은 중국시장에 눈을 돌리려 한다.
여기에 업체간 자존심 경쟁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한국통신과 SK텔레콤은 각각 최대의 통신사업자와 이동통신사업자라는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다.
삼성과 LG는 컬러TV를 시작으로 20여년 넘게 이어진 순위경쟁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동북아 통신시장 패권 경쟁도 자국내 경쟁에서 이겨야만 낄 자격이 있다. 한국 양궁선수들이 올림픽보다 대표선수 선발전에 더욱 긴장하는 것처럼….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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