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년동안 오로지 정보통신 연구개발(R &D)부문에서 일해오다 벤처기업을 창업한 A씨는 최근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엔지니어인 그로서는 기획·관리·마케팅·재무 등 경영전반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최고경영책임자(CEO)를 외부에서 영입하기로 한 것. 90%가 넘는 지분을 갖고 있지만 효율적인 경영을 위해 순순히(?) 사장자리를 내준 것이다.
벤처기업가 중에는 이공계 출신의 엔지니어로 「기술」과 「아이디어」만으로 창업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30대 전후의 젊은 사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좋은 기술을 가지고도 경영능력이 떨어져 빛을 보지 못하는 벤처기업들이 부지기수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CEO」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빠른 판단력과 비전을 제시할 줄 아는 유능한 CEO를 확보했느냐에 따라 기업의 가치가 달라지는 세상이 된 것. 이에 따라 CEO의 능력이 벤처캐피털이나 투자기관들의 투자·심사기준의 가장 중요한 핵심테마 중 하나로 떠올랐다. CEO가 누구냐에 따라 기업가치평가(valuation)가 달라진다. 심지어 투자의 전제조건으로 CEO의 교체를 요구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벤처산업이 국내에 빠르게 뿌리내리면서 기존의 「사장님」과는 다른 차원의 CEO 개념이 서서히 정착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벤처기업은 무엇보다 사람(맨파워)이 중요하기 때문에 경영능력과 자질을 갖춘 전문 CEO들의 몸값이 날로 급등하는 추세다.
이에 따라 전직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의 대표를 필두로 대기업 및 중소·벤처기업인, 국회의원 등 정치인, 변호사·회계사·언론인 등 전문직 등 현직에서 물러난 오피니언리더급 전문가들이 다양한 벤처기업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벤처 CEO로 변신했다. 홍보나 기업이미지 제고면에서는 탁월한 방송·연예인 출신들도 주목을 받았다.
더욱 저명한 CEO를 영입하기 위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특정 CEO가 여러 회사를 담당하는 이른바 멀티플CEO가 성행하는 것도 벤처시대의 새로운 흐름이다. 실제로 경영능력이 뛰어나고 지명도가 높은 전문가들의 경우 3∼4개 업체까지 다른 벤처기업의 CEO로 활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공채를 통한 CEO의 영입과 여성CEO의 부상도 최근의 두드러진 현상이다.
CEO의 부상은 또 최고재무책임자(CFO)·최고정보책임자(CIO)·최고기술책임자(CTO)·최고관리책임자(CMO) 등 각 분야의 최고책임자를 지칭하는 용어들을 잇따라 유행시키고 있다. 벤처 운영의 전문성 제고 차원에서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보급이 확대되면서 웹사이트 관리분야의 최고책임자인 CWO가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는 CEO에 대한 개념정립과 전반적인 사회적 이해도가 낮다. 전통기업의 사장과 CEO의 특성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 기존 벤처기업이나 창업자들이 사장자리에 연연, 독불장군식 경영에 집착하는 풍토가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다. 벤처비즈니스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전문 CEO를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벤처 전문가들은 『벤처업계가 구조적인 전문인력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정작 전문 CEO 문제를 인력난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며 『정부도 벤처비즈니스에서 CEO가 차지하는 비중을 제대로 인식, 전문 CEO 양성과 사회·문화적으로 CEO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도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중배기자 jb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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