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글 긴생각> 예정된 "IMF 환란"

 집에 굴러다니던 한 월간지에서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재벌을 해체, 전문화시켜야 한다」는 글을 읽게 됐다. 요사이 많이 접해온 내용이라 별 관심 없이 책장을 덮다보니 그 월간지는 지금으로부터 6년이나 더 된 92년 8월호였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이자 통일국민당 대표였던 정주영씨의 당시 주장을 소개하면서 92년에 정부가 제7차 5개년 계획으로 발표한 신산업정책의 주요기조는 부실금융의 정리와 상호지급보증 축소, 내부거래의 규제 등을 통해 재벌기업의 전문독립경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98년 8월호가 아닌가 의심되어 다시 한번 그 월간지의 겉표지를 보니 틀림없는 92년 8월호였다. 「일본은 차입금 의존도가 30.8%에 지나지 않는 데 반해 우리 기업은 42.8%로, 남의 돈으로 거대해질대로 거대해진 대기업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는 대목에선 섬찍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미 6년 전에 재벌기업들 자신은 물론 정치인 모두가 우리나라에 IMF 경제환란이 닥칠 것을 예상했었다는 것이고, 또 IMF 경제환란을 막을 수 있는 처방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지도자들은 그동안 내용이나 방법을 몰라서 이 나라에 경제위기를 불러온 것이 아니라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냉정히 인정해야 한다. 왜 못하였을까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 6년 전과 똑같은 정책으로 오늘의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며, 벼랑 끝에 몰린 오늘의 경제현실에서 더 이상의 실패는 곧 국가적 파국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의 현실이 말해주듯이 6년 전에 재벌의 소유집중을 완화하기 위해 내세운 정책들은 우물안 개구리식의 정치논리로 퇴색되었으며 오히려 정경유착에 의해 심화되었다. 글로벌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우리가 아니라 선진국들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부 관료들은 전부 개구리들에 불과했다. 힘없는 민초들은 지배만 하려드는 지도층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었다.

 김영삼 정권시 과학기술부 장관의 평균수명이 4개월에 불과하였다는 것이 말해주듯이 이 나라 경제의 근육질을 이루어야 할 과학기술은 정치적 도구로만 이용되었을 뿐 항상 말로만 하는 정치·사회·경제논리의 뒷전이었다. 오늘의 경제학자들은 IMF 경제환란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6년 전의 정책을 그대로 주장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제일 절실한 것은 지도층의 도덕성 회복이다. 5천억원이나 되는 돈을 착복한 대통령들을 정치적 논리만을 앞세워 뚜렷한 명분 없이 사면한 오늘의 현실에서 과거 잘못했던 사실을 들춰내어 일벌백계로 다스리자는 것으로는 이 나라 지도층들의 애국심이 결코 살아나지 못한다. 오늘의 재벌총수들을 그들이 펴낸 자서전처럼 위대한 기업가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우리나라에 경제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이며 오늘날 수많은 민초들을 실업으로 내몬 원인을 제공한 자들이다. 우리나라의 경찰은 이미 경찰이 아니며, 국회의원과 장관들은 서로를 그렇게 부를지 몰라도 민초들은 더 이상 그들을 지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적 승리를 위한 중용과 타협이 더 이상 미덕이어서는 안된다. 타락한 기업인과 그렇지 않은 기업인을 선별, 사회가 존경하는 기업가상을 만들어주고, 정경유착에 편승하지 않았던 정치인을 색인 발굴하여 국민의 영웅으로 키워주는 것이 오늘날 지도층의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다.

 우물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로부터 선진기술과 당당히 맞서 싸우고자 하는 과학자는 구별되어야 한다. 미국 프로스포츠 세계에 돈을 벌고자 뛰어들어 성공한 박세리와 박찬호 같은 운동선수에게 주는 훈장보다도 훨씬 더한 훈장을 산업현장에 밀착된 연구로 우리나라의 기업과 국가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애쓰는 과학기술자들에게 수여해야 할 것이다.

<주승기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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