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일이 되어 (9)

제2부 청년 성기수-미국 유학 (6)

성기수가 하버드 대학원으로부터 입학허가서와 학비 전액을 지급하겠다는 장학금 증서를 받은 것은 60년 6월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항공우주과학 학술지 「Journal of The Aero/Space Science」에 로켓탄도 근사공식(近似公式)에 관한 논문이 실린 지 두달 만이었다. 논문을 함께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선배 겸 친구 박철(朴哲)에게도 똑같은 입학허가서와 장학금 증서가 날아들었다.

20대의 성기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박철은 참으로 묘한 인연을 갖고 있었다. 성기수의 부친이 한국전쟁 때 고향 성주(星州)에서 부역자(附逆者)로 몰려 고초를 받다가 총살형을 당한 것과 달리 박철의 부모는 이북 고향에서 우익(右翼) 성향으로 참변을 당한 경우였다. 박철의 양친은 일제시대 때 고등공업학교와 사범학교를 나온 인텔리였다. 부모의 사상적 출발점은 달랐지만 사실 그런 것은 두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서로 높은 이상(理想)을 가졌고 인간적 교유의 단초가 될 수 있었던 문학과 음악 등에 대한 감수성도 비슷했다. 또 단신 월남한 박철이나 고향집이 풍비박산이 난 성기수 모두 고학(苦學)하는 처지였던 터라 서울대학교 기숙사 시절부터 공군사관학교 교관 시절까지 두 사람의 친교(親交)는 유별난 것이었다.

성기수가 당초 서울대 화공과에 입학했다가 2학년 진급과 함께 조선항공공학과로 전과(轉科)한 것은 바로 항공우주 분야에 대한 박철의 혜안(慧眼)에 절대적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정서적 취향이나 학문에 대한 관심사에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고(思考)의 영역이 비슷했으나 깊이에서는 상호보완적이었다. 이를테면 영어 실력과 예술에 대한 조예는 인텔리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박철이 앞섰고 수학(數學) 실력이나 과학적 사고에서는 성기수가 한 수 위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Journal of The Aero/Space Science」에 실린 논문 「Two Analytical Results of Fin-Stabilized Rocket Trajectory under Quadratic Drag Law(공기저항을 고려한 두 가지 방법의 로켓탄도 근사공식)」도 상호보완적 차원에서 나온 두 사람의 합작품인 셈이었다.

하버드 대학원으로부터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 증서를 받아든 성기수는 60년 9월 학기 입학을 목표로 곧바로 유학수속을 밟기로 했다. 그러나 박철의 생각은 달랐다. 박철은 신사였다.

『나는 가지 않겠어. 공저(共著)라고는 하지만 논문은 처음부터 기수 네가 썼고 나는 영역(英譯)과 타자기 두드린 일 밖에 별로 한일이 없잖아!. 사실은 하버드에 입학하더라도 자신이 없어. 내 실력이 탄로나 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박철은 하버드 유학을 마다하고 그해 말 항공우주 분야에서 명성을 얻고 있던 영국의 임피리얼 칼리지(Imperial College)에 입학했다, 박철은 그곳에서 항공역학(航空力學)분야 공학박사를 취득한 다음 미국 국립항공우주국(NASA) 산하의 에임즈연구소에서 30년 동안을 과학자로 일했고 현재는 일본 도호쿠(東北)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대학원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 증서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던 성기수의 하버드 유학은 그러나 수속 과정에서 여러가지 난관을 겪어야만 했다.

애당초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던 신원조회와 출국비용 마련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신원조회 때는 특히 전쟁 때 부역자 집안이라는 이력이 출국불허의 단초가 될 것만 같아 걱정이었다. 일부러 공군장교 복장을 하고 고향 성주(星州)의 경찰서를 찾아 담당형사를 만나보았더니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집안 내력를 파악하고 있던 경찰관들도 모두 타지로 전출돼 있었고 민주화에 대한 열기와 각종 민원(民怨)이 폭발하던 4.19 혁명 직후여서 그랬던지 신원조회는 간단하게 해결됐다.

부담이 됐던 서울발 보스톤행 비행기표는 미국의 대(對)아시아 지원단체인 아세아재단(亞細亞財團)의 도움으로 해결이 됐다. 아세아재단으로까지 연결된 것은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文政官) 매타카르트의 도움이 컸다. 매타카르트는 성주농고 1년 후배인 장태엽과 그의 은사 김순경(전 서울대 화학과 교수)의 소개로 만나게 됐다.

신원조회의 고비를 넘기자 이번에는 신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닥쳤다. 현역 군인으로서 일반 유학을 떠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50년대 후반 당시정부는 일부 예외조항을 두고 군복무 기간이 1년을 경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유학제대(留學除隊)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구비된 유학서류를 국방부 병무국에 제출하면 자동적으로 군복을 벗을 수 있게 하는 제도였다. 그런데 하필 성기수가 유학서류를 접수하는 날 이 제도가 폐지되고 말았다. 유학제대가 부유층 2세들의 병역기간 단축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많아 4.19 혁명 직후 이 제도가 여론의 강한 질타를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낙심천만하고 있는데 공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함께 근무하던 선배 물리학 교관 한필순(韓弼淳,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현 대덕타임즈 발행인)이 그를 공군본부 참모부장 신상철(申尙澈, 소장예편, 전 체신부 장관)에게 데리고 갔다, 신상철은 성기수가 교관 발령을 받은 직후인 58년 말까지 공사교장으로 재직했던 공군의 최고위급 장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한필순은 성기수보다 1년 앞서 교관에 부임했기 때문에 신상철을 잘 알고 있었다. 신상철은 국방부에 요청하여 성기수가 해외파견되는 현역 군인이라는 조건으로 성기수가 미국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해줬다. 여러가지 신분상의 제약이 따른다는 점에서 2년을 더 기다려 4년의 의무복부 기간을 채운 뒤 유학을 떠날까도 생각했지만, 입학허가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장학금 증서가 그때까지 유효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미 안질(眼疾), 치질, 치통, 폐결핵 등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던 때였다. 유학수속 등으로 심신까지 극도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다시 2년 후는 까마득한 미래처럼 보일 뿐이었다. 떠날 수 있을 때 떠나자는 결론을 내리고 출국 일만을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출국을 한 달 앞둔 60년 8월 중순 미국행 탑승권을 손에 쥐고 있던 어느 날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비자 발급이 거부됐다는 것이었다. 출국수속 과정에서 세브란스병원에서 찍은 엑스레이 사진에서 진행성(進行性) 폐결핵 증세가 판독됐기 때문이었다. 낭패였다. 세브란스병원의 담당의사인 닥터 안(安)에게 사정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하버드 측에 예정된 날짜에 도착할 수 없게 된 사정을 알리고 새로운 엑스레이 사진도 보내겠다는 편지를 냈다.

전쟁 중이던 51년, 열 여덟 한창나이에 사경을 헤맸던 병력(病歷)이 있었다. 전쟁과 가난으로 온갖 민간요법이 성행했고 시골병원 의사의 진찰이나 약사의 처방은 오진(誤診) 가능성이 더 많은 시절이었다. 면도날이 뱃속을 그어대는 복통 끝에 물컹하고 주먹만한 것을 토해내고 질겁했다. 그것은 수십 마리의 실뱀들이 얽혀 꿈틀거리는 듯한, 보기에 끔직한 회충덩어리였다. 성주에서 걸어서, 화물트럭의 꼭대기에 매달려 백리 길을 혼자 찾아간 대구의 김(金)내과에서는 그의 병명이 위축성염과 십이지장충 감염이라고 판정하고 약을 처방해 줬다. 그리고 1년여 투병생활은 끝이 났다. 진즉 진료를 받았더라면 갖은 고통은 당하지 않아도 될 간단한 병이었던 것이다. 그런 경험을 갖고 있던 성기수였다.

하루가 급한 마음에 곧바로 폐결핵 치료를 시도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주는 결핵치료제는 1회 복용분량이 한움큼이나 돼 식후마다 이를 한입에 삼키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허약한 소화기계통은 식사와 약복용 자체가 큰 부담이었지만 투약을 한번도 거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성기수는 별도의 생각으로 엑스레이 판독방법에 대한 정보수집에 나섰고 어느 정도 예비지식을 갖춘 다음 종로2가에 있는 한 엑스선과를 찾았다. 병원 원장에게 「Journal of The Aero/Space Science」 60년 4월 호를 보여주며 자신이 처한 딱한 사정을 털어놓고 엑스레이 사진을 위조(僞造)를 부탁했다. 허파사진 두 판을 촬영하되 한 판은 낡은 필름을 이용으로 6개월 전의 것으로 찍고 또 한판은 건강상태가 크게 나아진 허파를 담는 것이었다.

두 장의 엑스레이 사진이 미국으로 보내졌고 곧이어 하버드 측이 유학과 치료를 병행해도 무방하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처음에는 서울의 미국 영사(領事)가 닥터 안의 의견만이 유효하다고 고집하기도 해서 세브란스병원과 하버드 대학병원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유학비자가 발급된 것은 결국 하버드 측이 미국 국무부(國務府)에 결핵환자라도 좋으니 한국의 로켓탄도 과학자 성기수의 입국을 무조건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61년 2월 봄학기에 맞춰 미국 유학이 이뤄지게 됐다.

<서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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