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270)

승민의 전화번호였다.

혜경은 승민의 전화번호를 빠르게 눌렀다. 디주리두 소리 이어지고, 수화기를 통해 호출음이 들려 왔다.

두 번, 세 번, 네 번. 그러나 끝내 응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천천히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전히 응답이 없다. 혜경은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실내 한편에 걸려 있는 대형 그림을 바라보았다. 쇠사슬에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림.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준 죄로 제우스의 미움을 받아 영원한 고난을 받고 있는 프로메테우스가 자학과 쾌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혜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경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불꽃, 맨홀 속에서 솟구치던 불꽃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 불꽃 사이로 솟아오르던 독수리의 모습도 보였다. 혜경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몸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그 혼란 속에 차츰차츰 더 커지는 것은 환철의 모습이었다. 환철의 그 손끝 하나가 천천히 혜경의 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그 어둠을 발전차량에서 밝힌 전등불이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혜경은 눈을 감았다.

솟구치던 불길을 보면서 느꼈던 육체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거세게 혜경의 몸으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오늘도 불러내려야 하는가? 혜경은 다시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들고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또로로록, 저장되어 있던 번호가 송출되고 이어 호출신호가 이어졌지만 응답은 없었다.

어디 갔을까?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승민은 지금 집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혜경은 전화기의 후크스위치를 오프시킨 후 다시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금까지 눌러댄 전화번호가 모두 가짜인 것처럼, 천천히 또박또박 전화번호를 눌렀다.

무응답.

혜경은 다시 눈을 감았다. 무당의 집 사당 초가지붕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지붕 전체가 불덩이가 되어 말갛게 피어나곤 했다. 수많은 불티가 하늘로 날았다. 혼란스러웠다.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혜경의 몸을 달구기 시작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혜경은 프로메테우스의 눈빛을 다시 바라보았다. 자학과 쾌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눈빛. 혜경은 그 눈빛에서 늘 위안을 얻곤 했었다. 환철과 관계를 맺고 난 후 혜경은 프로메테우스의 그 눈빛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눈빛. 혜경에게 환철과의 관계는 쾌락이며 동시에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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