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163)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진기홍 옹은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섰다.

늦가을 저녁 해가 인왕산 기슭 붉게 물든 단풍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능선에 조각으로 걸려 있었다. 바람이 불고, 정원의 모과나무 이파리 몇 개가 바람 따라 떨어져 내렸다.

맨홀.

진기홍 옹은 통신용 맨홀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맨홀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맨홀 화재.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 맨홀은 여러 개의 통신망이 합쳐진 곳으로 거기에 난 불이 통신에 얼마만큼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전화가 불통되고 방송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것도 맨홀의 화재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알 수 있었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서울 시내를 비롯한 전국의 통신망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었다.

김지호 실장.

진기홍 옹은 김지호 실장을 떠올렸다. 대형 통신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정신없이 바쁜 그였다. 사고 때문에 전화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거였다.

바람이 다시 불고, 모과나무 이파리가 떨어져 내렸다.

진기홍 옹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광화문 네거리 맨홀. 진기홍 옹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광화문 부근은 우리나라에 전기통신이 도입되어 처음으로 그 시설이 설치된 장소로, 이제 세계 8위권의 통신 선진국이 된 우리나라 전기통신의 시발지이기도 했다.

일반 전화는 물론 우리나라의 중요한 통신시설이 집중된 곳으로, 그곳에 장애가 발생하면 국가 통신망에 치명적인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곳이었다.

진기홍 옹은 지하철 역으로 느리지 않은 걸음을 옮기며 요람일기가 쓰여진 때인 러, 일전쟁 당시 일본이 인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한 상황을 떠올렸다.

일본은 선전포고도 하기 전에 러시아에 대한 공격행위를 기습적으로 자행하였다. 1904년 2월 6일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에는 여순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였다. 이어 2월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 코레츠(Koryetz)호와 바리아크(Variak)호를 기습하여 침몰시켰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의 유일한 통신수단인 전보를 차단시켜 고립에 빠뜨린 후, 기습적인 공격으로 함대를 격침시키고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었다. 통신의 두절은 전쟁의 패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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