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처 발족과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 설치
60년대 주요 기관들이 외국에서 컴퓨터 도입을 서두르고 있을때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컴퓨터를 개발하자는 노력이 심심치 않게 시도됐다. 이런 노력은 락희그룹(현 LG그룹)이 사상 처음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생산, 우리나라 전자공업을 일으킨 59년이후 불붙기 시작해 60년대말까지계속됐다. 그런 가운데 60년대초 한양공대 전자공학과 대학원교수로 재직중이던 이만영(현 한양대 명예교수)은 컴퓨터 국산화를 몸으로 실천했던 대표적인 과학자였다. 당시 30대초반이던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믿기 힘든컴퓨터를 처음으로 직접 개발해낸 사람이었다.
이만영이 제작한 최초의 국산 컴퓨터에 대한 내용은 당시 한 신문에 "한국최초의 전자계산기 완성"이라는 제하의 머릿기사로 보도되고 있다. <"한양대학보"(현 한대신문) 64. 5.15>
이 신문에 따르면 이만영이 개발한 "전자관식 아날로그계산기"는 모두 3종으로서 소형인 제1호기(62년 8월)와 대형인 제2호기(63년3월)에 이어 이를개량한 제3호기(64년5월) 등이었으며 보도 내용은 3호기에 관한 것이었다. 3호기에 대해 신문보도는 정보처리보다는 공정제어나 물리량 계측 등에 사용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서 "연립대수식,고계의 선형 및 비선형 미분 방정식,편미분 방정식의 해답을 자동으로 계산할 수 있어 어떤 물체의 움직이는 진동상태를 재는 것으로부터 자동제어계, 항공역학계, 통신계, 음향계 등 다방면에 걸쳐 그 활용이 기대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콜로라도대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고 60년 귀국했던 이만영이 한양대 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중 이 컴퓨터를 제작, 완성하기까지는 온갖 어려움이있었다. 그는 당시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 계산기의 완성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컴퓨터를 제작하는 동안 가장 큰 애로사항은 각종 부속품을 입수하는 일이었다. 국내에서 생산할 수 없는 부속품을 구하기 위해 고물상들을 모조리뒤져야만 했다. …<중략> 이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제작에 착수했던 것은 나의전공인 제어공학 부문을 활용해보고 대학원생 강의에서 실습하기 위해서였다."<"전업건설신문" 64. 6. 1>
이만영의 "전자관식 아날로그 계산기"는 그러나 연구용이나 강의 실습기자재외의 상업용도로는 거의 사용되지 못했다. 뒤이어 불어닥친 IBM.스페리 등상업용 디지털컴퓨터 바람에 밀려 그의 컴퓨터는 한양대학교 박물관행 신세를 지고 말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이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항공기라든가레이더, 유도탄 등 정밀계산이 요구되는 무기체제를 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꿔말해 이같은 무기들을 생산하지 못했던 까닭에 "전자관식 아날로그 계산기"는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만영의 컴퓨터가 빛을 발휘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부차원에서이같은 노력을 평가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컴퓨터는 커녕 과학기술전반에 관한 정부차원의 정책이나 계획은 전무한 상태였다. 산업 연관효과를 따져 과학기술발전을 진흥시킬 수 있는 정책 시스템이 있었다면 이만영과 같은 젊고 유능한 과학자들을절망케 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지적이다.(그는 이후 미버지니아주립대교수로한국을 떠난다)
그러나 다행스러웠던 것은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62~66년)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정부는 이만영과 같은 젊은 학자들의 과학기술 개발의지를 북돋우게하는 한편, 경제부흥의 요체로서 과학기술정책을 정부차원에서 추진해야된다는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경청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정부가 발표한 첫 과학기술정책은 66년 경제기획원이 마련한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이었다. 정부는 또 같은 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 과학기술연구원)의 창설과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의 결성 등을 유도하면서과학기술발전과 진흥에 대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입안하고 시행에 나서기 시작했다. 또 국립과학관 마련을 위한 한미협의회와 같은 단체들을 잇따라 출범시켰다. 사실 과학기술진흥을 통한 경제개발계획 개념이 처음으로 적용된것도 이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때 마련된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이듬해 67년 1월 법률 제1864호로제정된 과학기술진흥법의 모태가 됐다. 특히 이 진흥법 10조2항에는 과학기술처장관이 수립해야할 시책과 계획 가운데 "전자계산기조직(컴퓨터)의 도입과 이용기술의 개발 및 정보처리요원의 양성에 관한 사항"등을 규정해 놓고있음을 볼 수 있다. 정부차원으로서는 최초로 컴퓨터에 대한 정책의지를 표명해 놓은 대목이라 할 수 있다.
66년에서 67년사이 경제기획원이 주도했던 일련의 과학기술정책 의지 표명은사실 "한송이 국화 꽃"에 비유되고 있는 과학기술처의 발족을 위한 것이었다. 정부는 65년 5월 박정희대통령의 미국방문시 존슨대통령과 한미양국 정부의 지원아래 KIST를 설립키로 합의할때부터 과학기술처의 발족을 계획해왔었다.
과학기술처는 마침내 67년 4월21일 김기형(작고)을 초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정식 발족 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을 정부차원에시 독자적으로 입안하고 시행하기 위한 최초의 정부조직이었다. 과학기술처는 특히 과학기술진흥법을 토대로 컴퓨터의 도입과 개발을 본격 추진해 나감으로써 오늘날 컴퓨터가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과학기술처 발족후 1개월후인 67년 5월23일 김기형장관은 취임후 첫 기자회견에서 역사적인 "전자계산기 사용 개발 7개년 계획"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골자는 컴퓨터요원양성과 훈련,소프트웨어의 수출, 컴퓨터에 대한 국민계몽,컴퓨터의 활용시기,법적지원,이를 추진할 위원회의 설치 등이었다. 김장관은 이미 세계 곳곳에 이미 5만여대(당시)의 컴퓨터가 보급돼 사용되는 상황에 비추어 우리나라에서도 하루 빨리 컴퓨터의 도입과 개발을 촉진시키고자이들 세부방침을 토대로 7개년 계획을 마련했던 것이다.
당시 기관이나 기업의 경우 컴퓨터 도입은 그 자금소요가 차관일 경우 과학기술처장관의 검토가 따랐다. 또 정부보유외환(KFX)자금으로 도입할 경우는주무부처 장관의 추천승인이 있어야만 허용되었다.
이를테면 컴퓨터도입 승인업무를 일관되게 처리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없었던 셈이었다. 또 국가적 차원에서 도입의 경제성 여부가 규명되지 않았거나구체적 운용계획이 마련되지 않은채 컴퓨터를 들여 놓을 경우 막대한 외화낭비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뿐만아니라 기관별 또는 기업별로 무분별하게 컴퓨터를 도입할 경우 컴퓨터요원 및 적용 업무량 부족에 따른 가동률의 저하가 우려되기도 했다. 컴퓨터가동률의 저하는 도입기관끼리 외부 용역수탁경쟁을 유발시킬 가능성을 안고있었으며 이렇게 되면 당시 정부가 육성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던 용역전문회사들의 위축을 초래할 것이었다. 용역전문회사는 곧 소프트웨어 수출의 첨병이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컴퓨터도입을 통제하고 소프트웨어용역 등 컴퓨터개발을적극 육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처는 "전자계산기 사용 개발 7개년 계획"에 따라67년9월 27일 전자계산조직(컴퓨터)개발 조정위원회를 설치, 공포했다.
이 위원회는 과기처차관을 위원장으로 각계에서 추천한 16명의 위원으로구성됐다. 국가정책과 기업분야의 경영개선 및 업무과학화와 생산성향상을위한 컴퓨터의 종합 개발 활용계획 수립.사전 도입검토.개발비의 조성과 배분.시설.교육훈련 및 보급 등 전반에 걸쳐 행정적 지원 및 통제가 주요 업무였다. 국책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컴퓨터산업육성 계획의 시발점이었던 셈이다.
컴퓨터의 도입검토나 개발 등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른실무조정은 초기에는 과학기술처 진흥국이 맡았다. 그러나 컴퓨터관련 정책업무가 점차 확대되면서 과학기술처는 71년 컴퓨터산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조직으로 정보관리실을 설치하고 컴퓨터도입 승인업무 등을 주관하게 했다. 정보관리실은 75년 정보산업국으로 확대 개편된다.
과학기술처가 발족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은 대망의 70년대를 향한 웅지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초창기 우리나라 컴퓨터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던 과학기술처의 최대당면과제는 컴퓨터를 이해하고 이를 업무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기회의 확대였다. 60년대말까지 과학기술처가 가장 우선적인 교육대상으로삼은 곳은 정부 각 기관 공무원들이었다. 공무원들이 먼저 컴퓨터를 이해하고사용할 줄 알아야 기관 및 기업의 컴퓨터도입 및 활용이 활성화된다는 당시의 시대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과학기술처는 이에 따라 발족 이듬해인 68년 4월부터 각급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기초과정, 고급과정, 특수과정 등으로 구성된 4주간의 EDPS요원 관리자과정 교육에 나섰다. 당시 재단법인 형태의 한국전자계산소(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가 맡아 실시한 이 관리자과정 위탁교육은 5월 13일 1차로 33명의수료생들을 배출하였고 71년 과학기술처 산하 중앙전자계산소(현 총무처정부전자계산소)로 그 교육이 이관되기까지 1백65명의 초창기 EDPS관리자요원을 양성해냈다.
주요 교육내용은 EDPS(전자식 데이터처리 시스템)의 개념, 프로그래밍의기본원리 및 실습, 포트란의 개념 등이었다. 관리자과정 교육이 성공적인 결실을 맺자 곧이어 16주 단위의 전문과정이 개설됐고 이는 공무원들 사이에어셈블러, 코볼, 포트란 등 본격적인 프로그래밍 교육선풍이 이는 계기가 됐다. 이때 한국전자계산소에서 공무원 위탁교육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이주용(현한국전자계산 회장), 송길영(현 고려대교수), 황칠봉(현 효성데이타시스템 사장), 이성길(현 협진정보통신 대표), 정명진(전CDK 상무) 등이었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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