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 (2);한국상륙 20년의 발자취

30여년전 도입초기의 컴퓨터들은 인구센서스통계와 더 많은 컴퓨터 도입을 위한 활용교육에 집중 투입됐다. 그래도 사람들은 컴퓨터가 마치 공상과학(S F)소설에 나오는 만능기계쯤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컴퓨터의 성능 이 트랜지스터를 사용하는 매우 초보 수준의 기계였음은 물론이다.

이제 컴퓨터는 1가구 1대 시대가 멀지 않았을 만큼 보편화됐으며 기능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됐다. 하물며 컴퓨터를 이용하는 영역의 다양성과 컴퓨터를 이용함으로써 변모된 산업 및 개인생활의 모습이란 말할 나위도 없을터이다. 그러나 오늘이 있기까지는 무작정 30여년의 세월이 쌓인 결과는 아니다.

그세월동안에는 선각자들의 피나는 의지와 그에 못지않은 수많은 시행착오 가있었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구하지 않더라도 지나 간역사를 뒤돌아 보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1년여 동안 연재될 컴퓨터 역사는 30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기쌓여진 신문.잡지.기업사사.연감.정부보관자료 등을 토대로 쓰여지는 것임을밝혀둔다. <편집자주> 컴퓨터에 눈뜨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컴퓨터는 1967년4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인구센서스통계를 위해 도입했던 IBM의 "IBM 1401"이다. 그런데왜 공식적 이라는 단서가 붙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여러가지 사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이 과정에서 "공식적"기록을 갖고 있는 "IBM 1401"이나 또는 "비공식적 "기록을 남기고 있는 후지쯔의 "파콤222(FACOM 222)"기종 그 자체가 중요한것은 아니다. 또 불과 1~2개월차이 밖에 나지 않은 도입시기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의미가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미국에서는 이미 1951년에 첫 상용 컴퓨터("유니백 I")가 출현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15년 이상이 뒤진 6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컴퓨터에 눈을 뜨기 시작한것이다. "IBM 1401"과 "파콤222"가 중요한 것은 이들이 바로 잠자던 우리의눈과 귀와 머리를 깨워주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어느 컴퓨터가 첫번째 도입된 기종이냐는 시비는 이같은 사실적 기록을 전제로 했을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선 1967년 4월에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 도입된 "IBM 1401"이 어떤 컴퓨터였던가를 살펴보자. 또 이 컴퓨터의 도입이 당시 우리나라 상황에서 어 떤의미를 던져주었던가를 알아보자. "IBM 1401"에 대해 당시 한 일간지는 "I BM전자계산기 등장 - 경기원에서 처음 시동, 1초 동안에 6만자나 읽어 라는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설치된 IBM전자계산기가 24일 낮 12시30분부터 시동되었다. 이 계산기는 시가 40만달러에 해당하는 것으로 통계국은 IBM회사에 대해 매달 9천달러의 사용료를 내고 빌린 이 전자 계산기의 성능은 예를 들어, 지난 66년의 인구조사 결과를 완전히 분석하자 면 통계국직원 4백50명과 2억1천만원의 돈, 그리고 14년 반의 시간이 걸리는데 이 기계를 쓰면 9천만원의 돈과 시간은 1년 반으로 단축할 수 있다."("동 아일보" 1967.6.24) 이같은 내용의 기사는 당시 도하 일간지에 모두 실렸는데 통계국은 67년 4월에 이 컴퓨터를 도입, 3개여월에 걸친 설치작업 끝에 이날(6월24일) 박정 희대통령, 장기영부총리, 김기형과학기술처장관, 김학열경제기획원차관 등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IBM 1401"의 가동식을 가졌던 것이다.

"IBM 1401"이 도입되기 전까지 통계국은 천공카드시스템(PCS)으로 각종 통계업무를 처리해 오던 터였다. 통계자료에 대해 단지 계산시간을 단축할 수있었을뿐 수동으로 집계하는 기계와 다름없었던 이 PCS는 66년에 실시됐던간이 인구센서스를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때마침 미국출장중 연방정부와 산업현장 등에서 컴퓨터가 유익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은 본 김학 열차관이 통계국에 컴퓨터 도입을 과감하게 지시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는지금과 달리 우리나라 전체인구중 컴퓨터를 구경해본 사람을 손에 꼽았을 정도로 컴퓨터에 무지했던 데다 기술정보의 부재로 어떤 기종을 택해야 할지막막한 상황이었다.

IBM사가 발표한 지 8년이 지난 "IBM 1401"을 통계국이 선택하게 된 것은매우 흥미있다. 당초 김차관 등이 도입하기로 결정했던 신형 "IBM시스템/370 (S/370)"가 계약 후 실제 도입까지 1년반이 걸렸을 만큼 주문이 쇄도했던 인기 기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전후사정에 대해 한 컴퓨터회사의 사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획원에서 컴퓨터를 도입한다는 얘기가 흘러나가자 몇몇 외국기업들이 자사기종 도입을 권유키 위해 기획원 방문이 잇따랐다. 선뜻 기종을 결정하지못하고 있을 때 마침 "타임"지의 S/370 기사를 본 김학렬차관이…(중략) 이기종을 도입키로 하고 IBM측과 기종도입을 협의했다. 그런데 기획원 관계자들과 협의하던 IBM영업대표는 S/370의 주문이 밀려 도입까지 1년 반이 걸리므로 잠정적으로 "IBM 1401"을 도입토록 권유했고 기획원 관계자들이 이 권유를 받아들였다."("한국아이비엠25년발자취") 이때 도입된 "IBM 1401"은 1959년에 개발됐던 것으로서 트랜지스터를 주기 억장치로 사용하던 2세대 컴퓨터였다. 1964년 IBM이 집적회로(IC)를 이용한3세대 컴퓨터 S/360을 발표할 때까지 세계적으로 6만대가 판매됐을 만큼 인기를 누렸다.

2세대 마지막 주자였던 "IBM 1401"은 모든 주기억장치 용량이 16KC(Kilo Character Kilo Byte)에 불과, 성능면에서 XT급 PC에도 못미쳤지만 크기는 캐비닛만한 본체와 여러대의 보조기억장치.인쇄장치.항온항습기.하네스 등 부대장비가 따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통계국은 "IBM 1401"을 월 평균 4백~5백시간씩 사용하면서 간이 인구센서 스자료를 처리하다 가동 1년반 만인 1968년12월 당초 예정했던 S/370(모델4 0)를 도입하게 된다.

"IBM1401"은 그러나 이처럼 우리나라에 첫 도입된 컴퓨터로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도입시점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엄연한 2세대 컴퓨터였지만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IBM 1401"을 도입한 주 목적은 앞서 지적했던 대로 기존에 도입해 쓰고 있던 PCS의 계산속도 향상이었다. 당시 신문기사나 관련자료들을 엮어 정황을 들여다 보면 김학렬차 관을 비롯한 기획원 관계자들의 "IBM 1401"에 대한 인식은 이 기종이 기존에사용해 오던 PCS보다 단지 한 단계 위의 기계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따라서 IBM 1401"의 이용시한도 S/370이 도입될 때까지만이라는 "잠정적"시간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기획원 관계자들의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시대착오적이었다 하더라도 PCS는 우리나라의 컴퓨터 도입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일부 학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1961년 3월 통계국이 도입했던 IBM사의 PCS를 우리나라에 도입 된 최초의 컴퓨터로 보는 시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1967년 당시 통계국 키펀치실 책임자였던 이춘희씨(현 KIST소프트웨 어공학연구부)는 한 회고문에서 "그당시 나는 최초의 컴퓨터시스템(PCS,IBM 1401)을 이용하여 인구센서스 통계처리를 하던…(중략)"(성기수박사 회갑기념집 1993)이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IBM 1401"의 "공식적" 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기종은 PCS 외에 앞서 언급한 파콤222 가 있다. 1967년 5월 생산성본부에 도입된 "파콤222"는 1961년 일본 후지쯔(부사통)신기제작주식회사가 개발한 것으로서 "IBM 1401"처럼 트랜지스터를 이용하는 2세대 컴퓨터에 해당된다.

"파콤222"의 성능은 기억용량이 18KC(1만8천어), 처리속도가 초당 1백만자 로역시 XT급 PC에 미치지 못했지만 "IBM 1401"보다는 우수했다. 가격도 6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한 신문은 "파콤222"를 "비교.판단.통제에 무한정"이 라고 쓰고 있고 이 기종이 설치된 생산성본부의 전자계산소 내부 사진을 함께게재하면서 "20만어(오기인듯)의 기억장치 등 거의 만능에 가까운 전자계 산기를 설치한 전경"이라며 경외감을 표시하고 있다.("서울경제신문" 1967.

6.20) "파콤222"의 외형은 "IBM 1401"을 훨씬 능가했는데 당시 한 잡지는 "총 하중35톤으로 모두 5대의 트럭에 분승돼 인천에서 서울 회현동까지 운송되면서 경찰 오토바이의 호위를 받았다. 운송에만 2백여명이 투입됐고 설치작업에 25톤 기중기가 철야 동원됐다"고 적고 있다.("기업경영" 1967.9)한국에 상륙 된 시점으로만 본다면 "파콤222"는 일본으로부터 인천항 도착일이 1967년 3월25일로서 1967년 4월15일인 "IBM 1401"보다 기록상으로 빠르다. 또 각각 운용장소에 설치돼 첫 가동에 들어간 날짜도 1967년 6월13일께의"파콤222"가 같은해 6월24일의 "IBM 1401"보다 10여일 빠르다. 그 뿐만 아니라 "파콤222" 를 도입한 생산성본부는 과기처의 기술요원 양성 계획에 따라 같은해 7월10 일 "제1회 전자계산조직 프로그래밍 기초강좌"를 개설하는 등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요원 양성교육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BM 1401"이 "공식적"으로 국내에 첫 도입된 컴퓨터로 남게 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이다. 당시 재무부장관 소관이던 수입 컴퓨터에 대한 통관허가가 "IBM 1401"은 1967년 4월25일, "파콤222"에게는 그보다 17일 뒤인 5월12일에 각각 내려졌다는 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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