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Image

미국은 위기 때마다 일어섰다. 60년이 넘게 글로벌 IT산업을 이끌며 강인한 자생력을 보여줬다. 1980년대 반도체 산업을 주도했지만 일본 추격으로 휘청거렸다. 2000년대 닷컴 버블로 곤혹을 치렀다. 다시 재기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깊은 불황을 겪었다. 2008년 경제위기 또한 경험했다. 미국이 위기 때마다 일어 선 배경은 첨단 기술과 기초 과학 경쟁력 때문이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관심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세계 첨단 기술 전진기지로 불리는 실리콘밸리가 있었다. 실리콘밸리는 세계 첨단기술과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역이다.

◇미국, 첨단기술에 막대한 투자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다양한 방법으로 첨단기술과 산업발전을 유도한다. 연구개발 비용에 대한 세금혜택, 첨단 제품 구입자에 대한 세금혜택 등을 입법 활동으로 지원한다. 매년 막대한 연구 자금을 대학, 민간기업, 정부 연구소 등에 투자한다. 민간 기업이 감당하기 힘든 위험부담이 큰 기술 개발을 지원한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집적회로를 처음 출시했을 때 가격이 너무 비싸 개개 소자를 납땜해서 사용하는 편이 훨씬 저렴했다. 이 상황에서도 미국 정부는 집적회로를 구매했다. 기업 부담을 줄여주고 연구개발(R&D)에 힘을 쏟으라는 뜻이었다. 군납 시장이 줄어든 1960년대 이후 실리콘밸리에 대한 미 정부의 직접 영향력은 크게 줄었지만 정부는 여전히 R&D 정책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로 실리콘밸리 기업을 포함해 미국 내 중소기업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해 왔다.

미국 정부 가장 큰 R&D 정책 특징은 개별 기업이 투자하기 힘든 기초연구와 중요하지만 실패 확률이 높은 고위험 분야 연구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과학재단과 국립보건원 등 기초연구 지원, 항공우주국 및 방위고등연구계획국 등 고위험 분야 연구는 미국 기업의 든든한 기반이다.

미 정부는 정부 예산으로 진행된 R&D 결과물이 기업을 통해 사업화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국립보건원, 항공우주국 등 기관은 R&D 결과물을 외부에 이전해 사업으로 연결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기술 이전 부서를 통해 외부 기업과 적극 소통하고 있다.

대학과 긴밀한 협조도 빼놓을 수 없다. 실리콘밸리 주변 스탠퍼드대학, 버클리대학, 국립 로렌스 버클리연구소 등 학계와 연구소는 정부 R&D 예산으로 수준 높은 연구를 한다. 이를 기업과 공유하고 있다. 다만 실리콘밸리 기업은 정부 지원은 받지만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경계한다. 자칫하면 자생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실리콘밸리 기업은 일반 소비자를 위한 제품 개발을 목표로 소비자 시장에 승부를 건다. 일례로 휴렛과 패커드는 HP 창업 후 국방성 기술 개발과 관련된 사업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도 국방성 기술개발사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미국의 힘, 실리콘밸리의 저력

실리콘밸리는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 탄탄한 기초과학 토대 위에 꽃을 피웠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전기공학과 양자물리학 발전, 20세기 초 샌프란시스코 전자기술 등이 실리콘밸리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다. 실리콘밸리가 등장하기까지 약 100년 역사에 걸쳐 기초과학이 자리 잡았다. 기초 과학 위에 첨단기술이 더해졌다. 덕분에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는 체력을 갖게 됐다. 2000년 초 일어난 닷컴 거품 붕괴와 2008년 경제 불황을 거친 후 실리콘밸리는 더욱 강해졌다.

반도체기업 중심이었던 실리콘밸리는 이제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기업 중심으로 변모했다. 실리콘밸리는 1960년대 반도체 중심지였던 명성은 사라졌다. 반도체 산업 환경 변화로 실리콘밸리 반도체 대기업은 반도체 공장을 매각했다. 반도체 칩 설계 전문 기업으로 변신해 살아남았다. 실리콘 반도체 수명이 다해가는 시점에서 솔라셀 등 실리콘을 대신할 물질과 기술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실리콘밸리에는 사물인터넷(IoT), 자동차, 청정에너지,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등 다양한 분야 첨단 기술 기업이 있다. '첨단기술은 실리콘밸리를 거쳐 간다'는 말이 당연할 정도로 세계 IT산업을 리드한다. 애플, 야후, 구글, 페이스북 등 쟁쟁한 기업은 물론 수천개에 달하는 스타트업 벤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력을 자랑한다. 2003년 약 9000여건이던 실리콘밸리 미국 특허 등록건수는 2013년 약 1만7000여건으로 증가했다. 이는 미국 전체 특허 등록 건수 10%와 13%에 해당한다. 점점 많은 특허가 쏟아진다.

◇대학이 창업 전진기지

실리콘밸리는 주변 대학교 영향을 톡톡히 봤다. 스탠퍼드대, 버클리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 대학, 산호세 주립대학 등 인근에 많은 명문 대학이 자리잡고 있다. 인근 대학에서 배출한 기술인력과 연구 성과가 실리콘밸리 기업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스탠퍼드대는 미국 최고 수준 공과대학, 법학대, 경영대 등을 통해 우수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또 스탠퍼드대 교수나 연구진은 실리콘밸리 기업과도 긴밀히 교류한다. 스탠퍼드대는 지역 엔지니어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연구진과 기업 공동연구를 한다.


스탠퍼드대 총장과 교수들이 창업에 직접 나서기도 한다. 스탠퍼드대 총장이었던 존 헤네시는 1984년 안식년을 맞아 MIPS 컴퓨터를 창업했다. 생명과학교수였던 마크 테시에르 라빈 총장은 제약회사 제넨테크 연구개발 총괄 부사장으로 근무했다. 학문과 사업이 접목돼 살아있는 기술이 생겨나는 구조다. UC버클리 등 나머지 대학들도 스탠퍼드대와 유사한 커리큘럼을 갖고 있다. 실리콘밸리에는 세계적 수준 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다. 대학, 연구소, 기업 간 긴밀한 교류는 이 지역만의 독특한 기술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또 다른 지역 인재가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선순환 효과를 낳았다.


전지연기자 now2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