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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수도 경주를 방문했을 때 든 인상이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도심 건물이 매우 낡았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도심에서 가로수 등 나무를 많이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현상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땅속에 잠들어 있을 신라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특히 경주는 땅속으로 뻗어갈 뿌리를 의식해 나무를 잘 심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 때문에 경주에는 꽃이나 갈대 등을 많이 심는다고 한다. 불편하지만 1000년의 역사를 그렇게 지켜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 뒤의 경주와 경주 시민들이 다르게 보였다. 또 첨성대 주변에 심은 꽃과 핑크뮬리도 다르게 보였다.

듣지 않으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어떤 목소리든 반드시 그에 부합하는 이유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주 서울 광화문과 서초역에서는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광장으로 모여들었지만 이를 평가하는 상대 진영의 인원 수를 축소하거나 의미를 애써 축소, 폄훼하는 데 그쳤다. 어느 누구도 왜 모여들었는지 상대 진영의 목소리에 초점을 맞추는 분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언론의 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자사의 관점이나 이익에 맞춰 재단하기에 급급했다.

공자가 '삼인행필유아사(三人必有我師)'라고 했지만 수백만 인파가 던지는 주장이 어느 쪽에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은 안타깝기만 한다.

물론 광장의 목소리에는 억지와 위선이 담겨 있기도 하다. 느끼기에 따라, 정의의 관점에서 어느 쪽이 더 많거나 가깝고 다른 쪽은 더 적거나 멀 수도 있다.

지난달 한 대학에서 주최한 초등학생 토론대회를 지켜본 적이 있다. 3명으로 구성된 20개팀이 참가해 상대팀을 바꿔 가며 세 번의 토론을 진행하고, 결승 진출 2개 팀이 공개 토론을 진행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원자력 발전을 주제로 진행된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초등학생 같지 않은 토론 진행에 감탄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원자력이라는 어려운 주제로 토론하는 것에 놀랐고,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된 것에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아쉬움은 어른들의 몫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남는 것 하나가 있었다. 바로 상대팀의 발언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었다. 토론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경청'을 초등학생들이 미숙하지만 실천해 내고 있었다는 점이 인상에 남았다.

살다 보면 먼저 듣는 쪽이 손해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서 먼저 듣지 않으면 광장으로 나온 극단의 대결은 제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듣는 이는 필요한 부분을 듣고, 인정하고, 고쳐 가면 된다. 억지와 위선은 버리면 그만이다.

잘 듣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다. 경청은 그렇게 힘을 발휘한다. 토론회에 참석한 초등학생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 광장에 모인 이들을 보며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사람일수록 더 잘 들어야 한다. 그래야 보인다. 내 편의 세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전에 양 극단으로 치닫는 광장의 함성이 어떤 주장을 담고 있는지 진지하게 들어봤는지 궁금하다.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