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게임시장은 미국, 중국에 이은 세계 최대 규모다. 지난해 기준 약 2조770억엔(22조6100억원)에 달한다. 온라인과 모바일 산업이 1조2450만엔(13조5500억원), 가정용이 3900억엔(4조2400억원)으로 집계됐다. 나머지 4420억엔(4조8200억원)은 게임센터로 대표되는 어뮤즈먼트가 차지한다. 온라인·모바일에 집중된 국내 게임시장과 달리 세 산업이 모두 고르게 성장했다.

비결은 민간 주도 '자율규제'다. 게임업체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 분야별 협회가 규제당국 역할을 대신한다. 산업 진흥과 규제 정책 간 균형을 맞추고 있다.

당장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닌 장기적 산업 발전 관점에서 자율규제를 설계한다. 사행성 짙은 게임, 오락 시설과는 철저히 선을 그었다. 일본 어뮤즈먼트산업협회(JAIA)는 여가 문화 한축으로 자리 잡은 파친코를 게임 영역에서 분리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 같은 자정 노력에 힘입어 최근 불거진 '게임 질병화' 논란에도 흔들리지 않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도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기업, 협회 행보에 지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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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아키하바라 내 게임센터 모습.

◇민간 자율규제, 게임업계 헌법

게임센터를 중심으로 기반을 넓혀온 어뮤즈먼트 산업이 일본 자율규제 효시다. 다른 게임에 비해 역사가 오래됐기 때문이다. 어뮤즈먼트를 기반으로 온라인·모바일, 가정용 게임 자율규제가 설계됐다.

게임센터는 1960년대부터 본격 들어서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경찰을 비롯한 규제당국으로부터 관리·감독을 받았다. JAIA가 1970년 자율규제를 만들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격투 게임에서 잔인하거나 폭력적 장면을 쓸 수 없게 했다. 과도한 노출도 금지했다. 게임이 도박으로 악용되는 것도 막는다. 게임 결과에 대한 보상을 지급하는 '메달 게임기'가 주요 타깃이다. 기기 제작 시 제재를 가한다. 일본 헌법과 다른 나라 주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게임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면 협회가 바로 개입, 시정 조치를 내릴 수 있다. 어린이가 게임을 지나치게 오래 하지 않도록 하는 규제도 협회 몫이다.

사행성과는 철저히 선을 긋는다. 인형뽑기로 대표되는 크레인 게임기 속 상품은 800엔(8700원)을 넘길 수 없다. 최근 1만원으로 가격을 올린 국내보다 오히려 적은 액수다. 일본 크레인 게임업계가 10년 전부터 가격 인상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지만 협회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자율규제는 게임 산업 헌법으로 통한다. 분야별 협회가 자율규제 제작 및 운영을 맡고 있다. 국내로 치면 게임물관리위원회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자율규제는 가이드라인 성격이지만 막강한 통제력을 갖는다. 게임 관련 규제법은 큰 틀의 방향성만 제시한다. 빈틈을 자율규제가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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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캐릭터 기반 인형뽑기 게임기가 전철역까지 가득 매웠다.

◇준수율 100%…더 단단해진 日게임

자율규제는 일본게임 산업에 깊게 뿌리 내렸다. 소규모 어뮤즈먼트 업체를 뺀 유명 게임기 제조사 중 90%가 JAIA 회원사로 가입했다. 일본 각지에 퍼져있는 게임센터도 80%가 자율규제를 적용받는다. 메달 게임기 제조사 8곳도 포함됐다. 메달 제작 기계를 만드는 회사 20곳도 회원사다. 자율규제 준수율은 100%다.

업계 노력이 뒷받침된 결과다. 어뮤즈먼트 산업은 세계적으로 하락세를 면치 못한다. 가파르게 성장하는 온라인, 모바일 게임에 시장을 내주고 있다. 일본 어뮤즈먼트 업계도 위축되긴 마찬가지다. 자율규제에서 해법을 찾았다. 사행성과는 철저히 거리를 두면서 정부와 일반 시민 지지를 끌어냈다.

파친코, 파치스로를 어뮤즈먼트 산업에서 제외했다. 과거 어두침침했던 공간은 밝고 활기 넘치는 분위기로 바꿨다. 온가족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시설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클레임 게임과 음악, 율동을 곁들인 리듬게임이 선봉에 섰다.

여세를 몰아 어뮤즈먼트 게임은 대중시설을 파고들었다. 전체 게임센터 중 절반 이상이 대형 쇼핑몰에 입주하는 성과를 냈다.

자율규제에 맞춰 자체 경쟁력을 키우기도 한다. 일본 어뮤즈먼트 시장 60%를 차지하는 크레인 게임기가 대표적이다. 800엔이 넘는 경품을 넣을 수 없다는 한계에도 불구, 폭발적 인기를 누린다. 크레인 게임기 전용 경품을 만드는 전문 업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중국, 미얀마, 베트남에서 경품을 제작한다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다. 제품 원가를 낮추기 위해서다. 차이점은 경품 대부분이 비매품이다. 인기 캐릭터 기반 완구나 인형이 주를 이룬다. 일반 상점에서는 팔지 않는다. 크레인 게임기에서만 뽑을 수 있다. 이 같은 희소성 덕분에 경품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치솟는다. 수백 배까지 오르는 사례도 흔하다. 캐릭터에 열광하는 일본인 정서와 맞물리면서 일본 대표 인기 게임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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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페이와 같은 전자결제 서비스로도 인형을 뽑을 수 있다.

최근에는 협회 주도 전자결제 확대 사업이 추진 중이다. 일선 게임장은 지폐나 동전 외 전자결제로도 게임을 할 수 있도록 내부 시스템을 앞다퉈 바꾸고 있다. 세수 확대 및 시장 투명화를 꾀하는 일본 정부 정책에 부응하겠다는 계산이 깔렸다. 일본은 오는 10월부터 소비세를 기존 8%에서 10%로 2%포인트 올린다. 소비세는 우리나라 부가가치세와 같다.

가타오카 토시 JAIA 부장은 “시장 투명성을 향상해 세수를 확대하려는 정부 뜻에 지지를 표한다”며 “전자결제 시스템이 확산되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자율규제 믿음, “게임 질병 가정에서 알아서”

세계보건기구(WHO)가 제기한 '게임 질병' 논란도 일본을 비껴갔다. 자율규제 기반 게임 생태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일본에서 게임장은 어린이 보호 구역으로 통한다. JAIA 소속 게임장 모두에는 '어린이 110'이라는 표지가 붙어있다. 길 가다 수상한 사람을 만난 아이들은 이 표지가 적힌 시설로 대피, 보호받을 수 있다.

협회 차원 인식 개선 노력도 계속된다. 매년 20차례 전국을 돌며 설명회를 연다. 게임 시장 현황을 소개하면서 부작용을 막기 위한 계획을 알린다. 이곳에서 나온 의견을 취합, 자율규제에 즉각 반영한다.

이에 따라 협회 심사를 통과한 게임, 게임 시설은 사회적 신뢰를 얻는다. 메달 게임기에 대해선 별도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협회가 보증을 서는 효과를 낸다.

메달 게임기는 파친코와 파친슬롯을 개조한 게임이다. 카지노, 파친코 시설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사행성 유무를 놓고 애매한 위치에 걸쳐있는 셈이다. 메달 게임기는 게임 결과에 따라 메달을 지급한다. 획득한 메달만큼 게임을 더 오래 즐길 수 있다. 경품으로 바꿔주지 않는다는 점이 파친코와 다르다.

협회 스티커가 없는 메달 게임기는 정상 유통이 어렵다. 일부 지방 경찰서는 스티커 미부착 게임기를 단속, 설치할 수 없도록 한다. 메달을 사고팔거나 경품으로 바꿔주다 적발되면 해당 가게 영업을 정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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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규제를 설명하는 가타오카 토시 JAIA 부장.

일본도 게임 중독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아이들은 사회적 고민거리다. 관련 연구소에서는 끊임없이 적정 게임 시간을 권고하고 있다. 다만 일본 정부는 개별 가정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주문한다.

게임보다는 파친코와 같은 사행성 짙은 시설이 집중 관리 대상이다. 이 같은 우려를 미리 알아차린 게임업계가 파친코 산업과 선을 그은 것이다.

가타오카 토시 부장은 “겜블 의존 현상, 질병에 걸린 사람 구하자는 목소리가 크지만 게임은 해당 사항이 아니다”며 “일본 정부나 협회가 별도로 준비하는 것은 전혀 없다”고 전했다.

[표]일본 게임 및 파친코 시장 규모(2018년)


(출처=일본 레저백서 및 어뮤즈먼트산업협회)

[해외 게임현장을 가다]<4>사행성 선 긋고 자율규제 100% 준수...'게임 日류' 우뚝

최종희기자 choij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