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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

여러 나라를 다녀 보면 각 나라의 법원에서 공통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 동상이다. 나라마다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한 손으로는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검을 쥐고 있으며, 두 눈은 안대로 가려져 있다. 저울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정함을 뜻하고, 검은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힘을 나타내며, 안대는 편견과 주관성을 떠나 객관 입장에서 판결을 내릴 것임을 의미한다. 두 눈을 가린 상태에서 사안의 본질과 실체만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비단 법원만이 아니라 우리는 더욱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블라인드 채용'이다. 채용 과정에서 가족 관계, 신체 조건, 출신 지역 등 선입견이나 차별 요소가 될 수 있는 정보가 가려진다. 인재 채용에서 눈에 보이는 피상의 것들, 외부 압력이나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지원자의 실체를 보고 채용하자는 의미이다. 최근에는 공정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인공지능(AI) 면접을 도입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문제는 지원자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정보가 필요한가이다. 흔히 '자소설'이라 부르는 자기소개서만으로는 공정한 채용이 이뤄질 수 없다. 채용 과정에서 수많은 지원자의 자기소개서를 일일이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면접 또한 지원자 실체 파악에는 부족하다. 지원자는 면접에서 자신을 보기 좋게 포장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자를 좀 더 객관 입장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추가 정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원자 역량을 검증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분야마다 다르다. 단순 업무를 위한 채용에서는 해당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업무 능력과 인성 검증 외에 많은 정보가 필요하진 않다. 이 경우에는 블라인드 채용이 공정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높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무로 갈수록 전문성과 역량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추가 정보가 필수다. 야구선수를 선발하기 위해서는 신체 조건과 경기력이 필수 정보인 것처럼 연구자를 채용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어디서, 어떤 연구를, 어떻게 해 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구자 채용에도 블라인드 채용이 적용되고 있다. 관계 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 가이드라인'에는 연구직의 경우 논문, 학위 등을 요구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기관에서는 규정을 보수 시각으로 해석해 그 이상은 요구하지 않고 있다. 혹시 모를 오해를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수많은 지원자 가운데 뛰어난 인재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눈을 가리는 것이 오히려 실체를 파악하고 공정성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프라운호퍼나 미국의 아르곤연구소와 같은 해외 우수 연구기관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일부 정보에 대한 블라인드로 공정성은 최대한 유지하되 수월성을 추구하기 위해 출신학교, 논문, 이력서, 연구계획서, 추천서, 면담, 발표 등 연구자의 전문성과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요구하고 있다. 연구자의 출신학교 정보가 중요한 이유는 분야마다 우수한 연구 실적을 내는 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과학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생명과학은 미국 하버드대, 지리학은 영국 옥스퍼드대가 각각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그 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는 것만으로도 지원자가 뛰어난 역량을 겸비했음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연구자를 채용하는 일은 연구기관의 수월성을 확보하는 일이며, 미래를 결정짓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중요한 일을 눈을 가리고 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더 좋은 연구자를 찾아서 더 뛰어난 연구를 하는 것이 공공연구기관으로서 공공성을 더욱 높이는 것이 아닐까.

인재를 채용하는 일은 보물찾기와도 같다. 보물을 빠르고 정확하게 찾기 위해서는 보물지도가 필요한 것처럼 연구자에 대한 정보는 우수한 연구자를 찾기 위한 보물지도라 할 수 있다. 공정성을 위해 보물지도에 구멍을 뚫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 연구자가 우리의 미래지도를 만들어 나갈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 wohn@ns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