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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산책]日 수출규제 대응, '슈퍼예산'만으로는 안된다

발행일2019.09.0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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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력과 군사력 바탕에는 기술이 있다. 강대국 역사를 기술 차원에서 통찰한 야쿠시지 다이조 일본 게이오대 명예교수의 저서 '테크노 헤게모니'는 경제·국방·외교 프레임을 떠받치고 있는 테크노 헤게모니의 작용을 파헤친 유일한 저서다.

기술 전이와 거기서 발생하는 에뮬레이션에 의해 기술패권이 이동하는 과정을 잘 설명했다.

그는 기술이 가장 앞선 나라가 세계사의 패권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기술패권이 없는 국가의 국력이나 경제력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사례를 통해 설명했다.

이 가운데 일본의 수출 규제로 자국 기술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는 지금 살펴볼 만한 사례가 하나 있다.

영국은 15세기 주철포 제조라는 하이테크를 바탕으로 하여 무기 대국으로 떠올랐다. 영국은 자국의 기술 유출이 심각해지고 밀조가 성행하자 1574년 '철포 금수령'을 내린다.

당시 해양 대국으로 도약하려는 네덜란드는 철포 제조 기술을 자급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네덜란드는 특허제도 강화와 기술 지원에 나선다. 기존 청동제 총기류 제작 회사가 철포 제조 기술을 빠르게 모방하고 개량하도록 특허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또 영국의 기술자를 영입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640년께 네덜란드제 철포는 가성비 면에서 영국제 철포를 능가했다. 오히려 영국이 이를 역수입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영국 수출 규제에 맞선 네덜란드의 기술 국산화 전략이 특허제도 강화를 통한 모방 촉진과 영국 기술자 영입 정책을 통한 기반 기술 지원이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는 일본 수출 규제에 대한 대응으로 기술 국산화를 외치며 관련 예산 2조원을 포함해 내년도에 513조원이 넘는 슈퍼예산안을 내놓았다. 우리는 이미 한 해 20조원 이상, 즉 국내총생산(GDP) 대비 4.3%를 연구개발(R&D)비로 쓴다. 이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수위권에 든다. 그러나 이번 일본 수출 규제 사태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기술을 자랑하는 삼성조차 해외 기술과 장비, 부품, 소재를 일정 부분 사용해서 반도체를 양산하고 있다.

기술 패권 없는 경제력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하는 시점이다. 기존의 R&D 비효율성을 그대로 두고 예산만 늘린다고 해서, 또 갑자기 국산화를 부르짖는다고 해서 기술 강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 사례에서 보듯 특허제도는 산업 활성화에 가장 효과 높은 수단이다. 특허 공개를 통해 모방을 촉진하면서도 강력한 권리 보호를 통해 개발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산업 발전 자생을 가능케 한다. 정부가 할 역할은 특허제도 강화, 선도 기술 지원이다.

단순히 돈만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산업발전을 위한 직접적 예산투자는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도 있어 오히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특허제도는 R&D 제도와 밀접하다. R&D 제도가 바로서지 않으면 아무리 강한 특허제도도 무용지물이고, 특허제도가 튼튼하지 않으면 R&D 제도 또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된다.

R&D제도와 특허제도 간의 역학관계나 각 제도의 문제점도 모르고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소재·부품·장비 자립화를 위해 예산 지원을 늘리고, 지식재산권 연계 연구개발(IP R&D)을 확대한다고 한다. R&D를 특허 관점에서 계획을 세워 진행하는 것이 IP R&D다. 예산 지원을 늘리기 전에 R&D와 특허제도 간 상관관계와 제도상 문제점이 해소되지 않으면 제 효과를 내기 어렵다. 근본 해법을 찾는 노력 없이 임시방편으로 예산 지원만 확대하는 것으로는 기술이 고도화되거나 R&D 경쟁이 촉진되지 않는다.

정부가 이를 깨닫지 않으면 이번 위기에서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수 있다.

IP R&D에는 특허 분석과 전략 수립이 필수다. 변리사의 전문 분야다. 변리사는 R&D 투자의 결과물을 특허권으로 만드는 전문가다. 우리나라 R&D의 현주소에 대해 변리사만큼 적나라하게 체감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R&D와 특허제도 개선을 위해 국회, 정부 등 각방으로 해결 방안을 제안했지만 여전히 그 중요성은 외면받고 있다. 예산 확대도 필요하지만 기존 제도의 문제점을 먼저 파악해서 개선하는 게 먼저다. 오래된 기계를 꺼내 쓰려는데 점검도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부가 발표하는 여러 정책에 정작 전문가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려가 적지 않다.

기존 특허제도나 IP R&D도 인적 설계가 미흡해 실효성이 없었다. 앞선 실패에 대한 점검없이 전문가가 배제된 정책만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기술력은 정직하다. 기술 강국을 원한다면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16세기 영국 금수령의 위기를 탄탄한 특허제도와 기술 지원으로 국산화에 성공하고 해양 대국으로서 17세기를 호령하던 네덜란드의 지혜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보이길 기대한다.

이원형 변리사(대한변리사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 leewh@kpa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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