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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팹. <사진=삼성전자>

#1994년 8월 29일.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일'에 삼성전자는 256M D램을 세계에서 처음 선보였다. 당시 반도체 시장을 휩쓸던 일본 업체들을 따돌리고 반도체 강자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독보적 지위에 올라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D램과 낸드플래시 제조 기술이 다른 업체보다 월등히 앞서 있다.

그러나 지난 3달간 우리는 일본에게 뼈아픈 일격을 당했다. 일본 정부가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등 첨단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로 국내 반도체 업계를 뒤흔들었다. 두 소재 모두 일본 기업 의존도가 컸다. 제한된 거래처, 미진했던 정부 투자 등 메모리반도체를 둘러싼 생태계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국내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의 완전한 '기술독립'을 구현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전면 국산화는 어렵지만 대안을 쉽게 구할 수 있을 수준의 국산화는 도달해야 한다는 게 업계 지적이다. 국산화는 급작스런 국제 갈등이나 천재지변에도 대응할 수 있을 뿐더러 비슷한 문화를 가진 협력사를 근거리에 두면서 제품 개발과 유지 보수에 속도를 올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반도체에서 '굴지'의 위치에 올라 있다. 메모리반도체는 IT 기기 내에서 연산한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거나 저장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구글, 아마존 등 IT 공룡 기업이 대용량 정보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데이터센터를 잇달아 세우면서 메모리반도체는 더욱 중요해졌다.

메모리반도체는 D램과 낸드플래시로 나뉜다. D램은 데이터를 신속하게 처리하고 전달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낸드플래시는 고용량 정보를 저장하는 역할이다.

양사의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은 50%에 육박하고 낸드플래시는 70%를 넘길 정도로 압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한다. 기술 또한 앞서나가고 있다. 삼성전자는 첨단 반도체 기술로 주목받는 EUV 공정을 내년 D램 공정에도 도입할 방침이다.

낸드플래시의 경우, 삼성은 세로로 쌓아올린 저장 공간에 전류가 통하는 통로를 한 번에 뚫는 '싱글 스택' 기술을 136층에도 구현해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보통 업계에서는 두 번에 걸쳐서 구멍을 뚫는 더블 스택 공법을 택한다.

반도체는 크게 8대 공정으로 구성된다. 동그란 웨이퍼에 층을 쌓고, 회로 모양을 그리고, 그것을 깎아내고 다시 새로운 층을 입히는 과정이 200~300번 정도 반복된다. 이 기술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제조 기술을 구현하도록 돕는 첨단 장비와 재료가 있기에 구현할 수 있다.

그런데 두 회사에 핵심 장비와 재료를 공급하는 회사 대부분이 외국 회사다. 장비의 경우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ASML, KLA, 도쿄일렉트론(TEL) 등이 반도체 전체 시장 70%를 장악하고 있다.

주요 반도체 공장은 한국에 있지만, 공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외산 장비라는 얘기다.

물론 국내에도 장비 회사들이 있다. 그러나 기술 기반이 외산 장비 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가가 많다. 이들 다수는 전공정 장비보다는 후공정 장비를, 이른바 '돈이 많이 남는' 최첨단 장비보다는 로 엔드 장비를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매출 구조도 차이가 난다. 올해 해외 주요 장비 업체가 반도체 업황이 한풀 꺾여도 20~30% 영업이익률을 가져가는 반면에 국내 장비 상장사들이 적자를 기록하거나 많게는 90% 이상 영업이익이 감소하는 것도 이 이유에서다.

소재 업계 사정도 마찬가지다. 지난 7월부터 일본 정부가 EUV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등 반도체 핵심 소재를 건든 것도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열악함을 들여다보고 결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JSR, TOK, 신에츠 등은 EUV용 포토레지스트 외에도 현재 가장 많이 쓰이는 불화아르곤(ArF) 공정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제 갈등으로 한바탕 폭풍이 휩쓸면서 업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소재 다변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보호무역주의 기조 아래 다양한 거래처를 확보하는 전략을 세우면서 국내 업체 육성에도 공을 들이자는 얘기다.

한 업계 관계자는 “모든 소재를 국산화할 수는 없지만 혹시 모를 위기에 대비해 대안을 만들어 놓아야 더 효율적인 글로벌 공급망을 확보할 수 있다”고 전했다. 또 “국산화는 급작스런 국제 갈등이나 천재지변에도 대응할 수 있을 뿐더러 비슷한 문화를 가진 협력사를 근거리에 두면서 제품 개발과 유지 보수에 속도를 올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 규제를 계기로 정부와 업계도 불이 붙었다.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위한 예산 5조원을 3년간 투자한다. 학계와 연구기관을 전폭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소재 관련 석·박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정책도 최근 닻을 올렸다.

업계에서도 지금이라도 기술 독립에 속도를 올려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도 이번 사태 이후 국산화에 대한 의지를 보이면서 후속 조치를 마련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그간 소자 제조 기술이 월등하게 빠르다보니 장비나 소재 개발 속도가 느렸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산업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예산이 꾸준하게 투입돼 인력과 기초 과학 기술을 양성해야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고 전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