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과학기술원(UNIST) 연구진이 기존 2진법 반도체에 비해 초절전, 고성능, 소형화 등에서 장점이 있는 '3진법 반도체' 상용화 가능성을 확인하는 연구에 성공했다. 김경록 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팀은 '3진법 금속-산화막-반도체(Ternary Metal-Oxide-Semiconductor)'를 대면적 웨이퍼에 구현했다고 7월 17일 밝혔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일렉트로닉스(Nature Electronics)'에 7월 15일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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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진법 컴퓨터 개념 새로운 것은 아냐

3진법 반도체는 컴퓨터 작동의 절대 원리로 여겨졌던 0과 1의 2진법 체계를 벗어나, 0과 1, 그리고 2라는 세 가지 숫자를 활용하는 3진법 차세대 초절전 반도체 소자 및 회로 기술이다.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기기는 전류가 흐르는 'on' 상태를 1로, 전류가 차단된 'off' 상태를 0으로 환산한 2진법 시스템으로 정보를 처리한다. 이와 같은 방식은 명쾌하지만 항상 최선은 아니다. 단계를 하나 더 추가해 3진법 신호를 구현하며 더 효율적인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

가령 숫자 128을 표현하려면 2진법에서는 8개의 비트(Bit, 2진법 단위)가 필요하지만 3진법으로는 5개의 트리트(Trit, 3진법 단위)만 있으면 저장할 수 있다. 이처럼 3진법 체계를 사용하면 처리해야 할 정보 양이 줄어 계산 속도와 시간을 단축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전력 소모량도 절약된다.

이런 이유로 1940~50년대 학자들은 2진법 컴퓨터를 개발하면서 동시에 3진법 컴퓨터에도 관심을 가졌다.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 컴퓨터과학자 니콜라이 브루센트소프와 수학자 세르게이 소볼레프가 1958년 개발한 3진법 컴퓨터 '세툰(setun)'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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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러시아에서 개발한 3진법 컴퓨터 세툰. (출처:http://www.icfcst.kiev.ua/MUSEUM/PHOTOS/Setun.html)

◇초소형, 저전력을 위한 미래 반도체

그러나 상용 컴퓨터 주도권이 2진법 컴퓨터로 넘어가면서 3진법 컴퓨터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반도체와 트랜지스터, 집적회로가 개발되면서 2진법 컴퓨터가 폭발적으로 발전했고, 미국 IBM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2진법 컴퓨터가 보급됐다. 반도체와 집적회로 등 생산공정도 2진법 반도체를 기준으로 구축되면서 2진법 컴퓨터는 산업을 주도하는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 속에서 잠시 잊혔던 3진법 컴퓨터가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컴퓨터 핵심 재료인 반도체 집적회로를 2진법으로는 더는 작게 만들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사물인터넷(IoT) 시대에 빅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소자의 크기를 줄이면서도 집적도를 높여 급격히 증가하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2진법 반도체는 작게 만들수록 누설전류가 커지고 덩달아 소비전력도 증가하는 단점이 있고 발열 때문에 회로 안정성도 떨어진다.

한편 3진법 컴퓨터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3진법으로 정보를 변환하고 처리할 소자를 개발해야 한다. 과거 세툰 컴퓨터는 진공관을 이용해 -1, 0, 1의 3진법을 구현했으나 진공관으로는 현재 반도체 집적회로처럼 소형화시킨 소자를 만들 수 없었다.

이에 새로운 3진법 소자를 개발하기 위해 전 세계 곳곳 연구자들이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왔다. 최근 주목받는 방법은 'on'과 'off' 두 가지 상태밖에 없는 전기신호를 받아 세 가지 상태를 나타내는 소자를 만드는 방식이다.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 그래핀과 흑린 등 독특한 물성을 가진 물질이 발견되며 이를 이용해 3진법 소자를 구현하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김경록 교수팀은 지난 2015년 8월 기존 2진법 소자의 구조 및 공정을 그대로 적용해 3진법 소자와 회로를 구현하는 방법을 개발해 국제전기전자학회(IEEE)에서 발행하는 '전자기기학술지'에 발표한 바 있다. 이들이 개발한 '3진법 금속-산화막-반도체'는 전자나 정공 같은 불순물을 첨가한 물질을 반도체 사이에 통과시켜 전류를 흐르게 하는 방식으로 3진법 직접회로를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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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2진법 반도체와 3진법 반도체의 차이를 나타내는 개념도. (출처: VIEW H 네이버포스트)

이번 연구에서 김경록 교수팀은 발상 전환을 통해 소비전력을 높이는 원인 중에 하나였던 누설 전류를 반도체 소자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상태를 구현하는 데 활용했다. 누설전류 양에 따라 정보를 3진법으로 처리하도록 고안한 것이다.

김 교수는 “이번 연구는 기존 2진법 반도체 소자 공정 기술을 활용해 초절전 3진법 반도체 소자와 집적회로 기술을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대면적으로 제작돼 3진법 반도체 상용화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서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의 공정, 소자, 설계 전 분야에 걸쳐 미래 반도체 패러다임 변화를 선도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글: 김민아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