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Image

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IT 공룡들이 일본 수출규제 조치 직후 삼성전자를 다급히 찾은 것은 이번 사안이 미칠 파장을 심각하게 우려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삼성 메모리 생산에 차질이 생길 경우 자사 제품 출시나 서비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미국 정부도 한일 갈등 해결을 위해 '조정자' 역할을 하겠다고 밝혀 주목된다.

애플은 삼성전자에서 D램과 낸드플래시를 구매해 아이폰을 만든다.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는 주로 서버 및 데이터센터에 삼성 메모리를 쓰고 있다. 서버와 데이터센터는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의 핵심 사업인 클라우드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 인프라다.

데이터센터는 전 세계 메모리 시장의 핵심 수요처다. 최근 5년 간 D램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로 찾아온 '반도체 사이클'도 아마존과 같은 글로벌 IT 업계에서 데이터센터 투자 열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런 데이터센터 투자 호황에 힘입어 지난해 3분기 17조5000억원이라는 분기 최대 영업이익을 거두기도 했다.

이런 산업 구조에서 일본의 대(對)한국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는 미국 IT 기업에 불안요소가 아닐 수 없다. D램이나 낸드플래시 메모리가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생산되지 않으면 가격이 급등하거나 원하는 물량을 확보할 수 없고 결국 완제품 제조나 데이터센터 등 인프라 투자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메모리는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 대만 난야, 일본 도시바 등도 생산 중이다. 대체재가 전혀 없는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D램은 국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70%, 낸드플래시는 50% 이상을 점한 상황이기 때문에 삼성과 하이닉스의 생산 차질은 곧 전체 시장의 수급 불안으로 이어진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과거 하이닉스에 사고가 났을 때도 당시 PC 시장 1위이던 HP 구매팀이 전세기를 띄워 급파된 적 있었다”며 “한국 메모리가 탑재되지 않은 기기가 없을 정도다보니 이번에도 미국 IT 회사들이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특이한 것은 미 기업 구매팀이 삼성전자의 극자외선(EUV) 공정을 챙겼다는 점이다. EUV는 현재 시스템 반도체 생산에 적용돼 파운드리만 연관 있는 것으로 일반에 인식됐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내년부터 EUV를 메모리 제조에도 활용할 계획을 갖고 있다. 때문에 미 구매팀은 차세대 메모리 생산까지도 이번 수출 규제로 영향을 받을까 걱정하고 상황을 점검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 정부는 포토레지스트 중에서도 EUV용을 한정해 규제를 강화했다.

미국 IT 기업들 우려가 확인됨에 따라 미국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할지에 관심이 쏠린다. 일단 한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방한한 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현재 한·일 관계 긴장 상황에 엄청난 관심이 집중된 것을 알고 있다”면서 “강경화 장관과 윤순구 차관보가 한국 입장을 설명했고 나는 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미국은 우리의 두 가까운 동맹인 한국과 일본 관계를 강화하는데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있다”면서 “진실은 한일 간의 협력 없이는 어떤 중요한 이슈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정부 인사가 한·일 갈등과 관련해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외신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를 향해 수출 제한 조치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일본이 사전 통보 없이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소재 수출을 제한한 것은 결국 애플, 아마존, 델, 소니뿐 아니라 세계 수십억명 소비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경고했다.

이 관계자는 “과학과 기술은 전쟁 도구가 아니다”며 “그것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은 최근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주최국이자 세계자유무역 촉진 후원자로서 자유무역 원칙을 지키겠다고 세계와 약속했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자유무역의 가장 큰 수혜국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성현희 청와대/정책 전문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