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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25개 정부출연연구기관 '역할과 책임(R&R)' 재정립 작업이 일단락됐다. 과기정통부와 출연연은 8개 중점 핵심 분야를 설정하고, 각 출연연이 주력할 연구 분야를 정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출연연 R&R 재정립 작업이 끝난 것은 아니다. 출연연이 새로 정립한 R&R에 맞춰 운영하려면 예산 수급 방안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과기정통부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및 출연연이 마련한 새로운 R&R 방향은 어떻게 되는지, 또 가장 어려운 문제인 수입구조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 출연연 현장을 밀착 취재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는 지난달 말 대덕특구 내 한국화학연구원에서 '공공기관 R&R 성과공유 회의'를 열고, 그동안 정립한 출연연 R&R 방향과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지난해 9월 정한 큰 틀을 유지하면서 8개 핵심 분야를 정하고, 연구개발을 담당할 출연연을 배분하는 등 세부 내용을 담았다.

문제는 출연연이 그동안 수행해 온 연구과제중심제도(PBS) 과제 가운데 새로운 R&R 방향과 맞지 않는 과제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출연연별로 처한 상황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다수 출연연은 PBS 과제를 포기하면 그만큼 예산이 줄어 연구원 인건비를 충당하기 어려워진다. 수입구조를 바꾸는 일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부 출연금을 늘려 충당하면 되겠지만 PBS 과제로 나오는 연구개발(R&D) 예산이 여러 부처에 산재해 있어 쉽지 않다. 과기정통부 산하기관에 타부처 예산을 출연금으로 전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출연연 R&R 재정립 작업이 일단락됐음에도 출연연은 물론 과기정통부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도 이같은 난제를 해결할 묘안이 필요한 때문이다. 과기정통부는 출연연이 직접 그 얼개를 짜도록 했다. 일단 출연연이 포트폴리오 방안을 마련해 오면 그 것을 토대로 최적의 방안을 함께 도출해 확정하자는 의도다. NST가 나서 조율을 하고 있다.

◇보여주기식 연구 배제...기관 바텀업으로 진행

이번에 정한 출연연 R&R는 정부와 출연연이 1년 이상 작업해 마련한 운영 방향이다. 출연연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구체화했다. 기관마다 적게는 2개, 많게는 6개로 '상위 역할'을 설정하고, '주요 역할'이라는 이름으로 세부 과제를 정했다. '보여주기식' 얕은 성과 창출이나 인건비 확보 수준에서 추진하던 1억~2억원 규모 단기과제는 과감히 없애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10~15년 단위 장기 과제를 수행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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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연 R&R 역할구성

출연연은 그동안에도 일정 주기마다 기관운영 계획, 경영성과 계획, 연구성과 계획 등 다양한 운영 방안을 마련해 왔다. 하지만 이번 R&R는 상향식(바텀업)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과기정통부와 NST는 지난해 1월 과기정통부가 '출연연 발전방안' 핵심 어젠다로 R&R 정립 추진을 결정하면서부터 출연연에 바텀업 R&R 수행을 강조했다.

이렇게 수립한 R&R 상위역할은 90개에 달하고, 주요역할은 200개가 넘는다. NST는 이들 내용을 토대로 총 8개 중점 핵심 분야를 도출했다. 8대 중점 연구 분야는 △국민생활·안전 △데이터·네트워크·AI(D.N.A) 원천기술 △과학기술 인프라·서비스 △지속가능사회 구현 △거대과학·사회기반 기술 △지역발전 특화기술 △남북 과학기술 교류협력 △미래산업 핵심기술이다. 우리나라 전체 과학기술 분야를 망라한다. 충실하게 이행하면 우리나라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중심인 출연연이 새로운 변화를 맞고, 과거 영광을 되찾을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원광연 NST 이사장은 “출연연이 왜 존재하는지 이유를 되돌아보는 차원에서 기관별 R&R를 수립하게 됐다”면서 “기관 내부 구성원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수입구조 포트폴리오가 가장 큰 난제

유영민 과기정통부 장관 말대로 출연연 R&R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는 일이다.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벌써부터 R&R 수정작업을 추진하는 출연연이 있다. 특히 '출연연 수입구조 포트폴리오' 수립은 가장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과제다. 새로 정립한 출연연 R&R는 수입구조와 맞물려야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기정통부도 PBS 개선 과제를 R&R와 연계해 추진해 왔다. R&R로 기관 고유 역할을 구체화해 해당 분야에 출연금 지원을 집중하고, 연관성이 떨어지는 분야는 외부 과제를 수탁해 진행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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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지난달 24일 한국화학연구원에서 열린 공공기관 R&R 성과공유회의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당시 과기정통부는 각기 다른 출연연 기관 사정에 따라 '맞춤형 PBS 개선'을 이루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R&R를 기준으로 활용하면 자연스럽게 기관 상황에 맞춘 PBS 개선이 가능하다고 봤다. 기준 연도를 2021년과 2023년으로 나눠 기관이 수행할 주요 연구과제와 출연금 및 예산 금액 등을 명시한 형태로 수입구조 포트폴리오를 마련하게 했다.

출연연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작업이다. 지금까지 25개 과기정통부 산하 출연연 가운데 6개 기관만 포트폴리오를 제출해 통과 판정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화학연구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한국천문연구원, 한국한의학연구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등이다.

다른 19개 출연연 가운데 11개는 검토 및 수정·보완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나머지 6개 출연연은 아직 포트폴리오 계획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NST는 이달 말 열리는 이사회에 11개 출연연 포트폴리오 계획을 상정해 2차로 확정하고, 나머지 6개 출연연 계획은 연말까지 계획을 받아 처리할 계획이다.

과기정통부는 포트폴리오 작업을 독려하기 위해 당근과 채찍도 제시했다. 완성도가 높은 출연연에는 내년도 고유사업비에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늦어지는 출연연은 예산을 일부 삭감하기로 했다. 이미 내년도 예산에 반영했고, 2021년 예산에도 반영할 예정이다.

이 때문에 과기정통부가 예산을 볼모로 출연연에 숙제를 떠넘긴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더구나 과기정통부는 R&R와 수입구조 포트폴리오를 토대로 인력 구조조정도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출연연 입장에서는 확실한 존재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예산을 지키기 위한 묘안 만들기에 정신이 없다.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딜레마부터 풀어야

수입구조 포트폴리오 문제의 출발은 각 부처에 산재한 국가 R&R 예산이다. R&R에 부합하는 PBS 과제는 출연금으로 대체하면 되지만 타 부처 예산을 마음대로 전용할 수는 없다. 해당 사업을 이관 받거나 정책지정 과제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기획재정부 및 해당 부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과기정통부는 관계부처 협의로 문제를 풀어간다는 방침이다. 국가과학기술심의회 운영위원회 회의에 수입구조 포트폴리오 내용을 안건으로 올려 논의, 부처 간 협력 물꼬를 트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현장에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한 출연연 고위관계자는 “타 부처 사업을 이관받거나 정책지정 과제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과기정통부 R&D 예산만 가지고는 수입구조 포트폴리오를 제대로 만들 수 없고, 이는 결국 새로운 R&R를 지키는 데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국가 R&R 예산을 일개 부처 산하기관인 출연연이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계획해야 하는 것이 바로 수입구조 포트폴리오다. 힘든 것이 자명하다. 처음에는 출연금 비중을 대폭 높이는 방향으로 포트폴리오를 설정했다가 다시 하향 조정하거나 되레 낮추는 출연연도 있다. 출연금 비중이 낮은 출연연은 새로운 R&R와 수입구조 포트폴리오를 맞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토로한다. 모두가 만족할 수입구조 포트폴리오 계획을 마련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표>출연연 R&R·수입 구조 포트폴리오 수립 주요 경과

<표>출연연 8대 핵심 중점연구방향과 참여기관

[출연연 R&R 재정립] <프롤로그>PBS 대체할 포트폴리오 구성이 난제
[출연연 R&R 재정립] <프롤로그>PBS 대체할 포트폴리오 구성이 난제

대전=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