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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단상]혁신의 딜레마, 한국판 실리콘밸리

발행일2019.01.3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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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쯤 어느 휴대폰 회사 회장이 직접 대중 앞에서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전엔 보통 제품 개발 담당자가 여러 언론을 초대해 제품 출시를 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기업 회장으로서 격식과 위엄을 버리고 검은색 터틀넥에 청바지, 뉴밸런스 운동화를 신고 대중 앞에 섰다. 기존 상식과 통념을 깨는 괴짜 리더십. 바로 혁신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티브 잡스였다.

많은 전문가가 잡스 성공 이면에는 실리콘밸리가 있다고 말한다. 실리콘밸리는 미국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천국으로, 정보기술(IT) 분야의 유수한 엘리트들이 경쟁하는 이른바 '세계 IT 인재 블랙홀'이다. 창업자들은 혁신 기반 스타트업을 키워 상장시키거나 매각하는 식으로 큰돈을 모아서 더 나은 혁신을 위해 재투자한다. 이러한 '끊임없는 연쇄 창업' 결과 실리콘밸리는 현재 애플·구글·페이스북·트위터·넷플릭스·이베이·우버 등 이름만 들어도 혁신이 떠오르는 기업, 더 나아가 우리 삶의 패턴을 바꿔 놓는 그 무언가를 보유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500평방마일 남짓한 이곳에서 미국 전체의 14%에 이르는 특허 등록이 이뤄지고, 개별 특허 가치를 반영하면 미국 혁신의 상당 부분이 창출되고 있다. 또 경제 잡지 포천이 선정한 1000대 기업 가운데 39개가 포함돼 있다. 이들은 거의 모두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 내 벤처캐피털 투자 가운데 3분의 1이 이뤄진다. 또 이곳 근무자의 소득 평균은 8만6976달러(약 1억원)로,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미국 전체 평균의 두 배에 가깝다.

이렇듯 매력 만점의 실리콘밸리를 꿈꾸며 수많은 국가가 이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영국의 테크시티런던, 프랑스의 파리-사클레 혁신클러스터, 중동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이스라엘의 실리콘 와디, 러시아 스콜코보의 혁신도시, 칠레의 칠리콘밸리, 인도 방갈로르 클러스터 등 일종의 국가 간 혁신 클러스터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일류 IT를 보유한 우리 역시 예외일 순 없다. 선거 때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만들겠다는 여러 공약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현실성이 가장 높은 곳은 '판교테크노밸리'다. 미래에셋금융이 약 1조9000억원의 부동산펀드를 조성해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초대형 혁신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있다. 최대 인터넷 포털 기업인 네이버가 여기에 약 2000억원을 출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동산 시장은 크게 출렁이고 있다.

필자는 '한국판 실리콘밸리'가 가까운 미래에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함께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러나 '강남역까지 30분대에 이동 가능' '초역세권 아파트단지 보유' 등 이야기를 들으면 한편으론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실리콘밸리는 혁신 아이콘임과 동시에 실제로 미국 내 소득 불평등이 가장 심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창업 기업의 1%만 생존하는 벤처기업의 무덤이기 때문에 기술 혁신 혜택이 소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2017년 실리콘밸리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지역의 근무자 간 소득 격차는 '고도 기술-높은 임금' 논리 아래 지난 25년 동안 꾸준히 심화됐고, 중산층은 점차 저소득층으로 대체됐다.

'판교테크노밸리'라는 큰 틀의 거시 정책 방향은 이미 잡혔다. 정부의 혁신 노력에 감사한다. 잡스의 말을 빌려 “항상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Stay hungry, Stay foolish)”며, 우리의 간절한 혁신 바람을 실현시켜 주길 바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사회 약자 층을 배려한 각종 사회 안전망 지원 사업, 즉 미시 정책에 대한 고민에 소홀하면 안될 것이다. 우리가 벤치마킹 하려는 실리콘밸리에선 지난 오랜 기간 새로운 혁신을 통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 이면엔 지역 주민들이 겪어야 한 혹독한 양극화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백승진 유엔경제사회위원회 정치경제학자 baek@u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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