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프랑스에서 개최된 국제도량형 총회(CGPM)에서 질량의 단위 '㎏(킬로그램)'을 새롭게 정의하는 기술적 방식이 최종 결정되었다. 130년 동안 파리에서 보관한 '킬로그램 원기'가 질량 1㎏을 나타내는 '기준'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 그 역할을 마치고 박물관에서 여생을 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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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량 원기는 백금과 이리듐을 합성해 제작한 분동이다. 1889년 미터 조약에 따라 제작했으며 파리에 위치한 국제도량위원회(BIPM)에서 엄중히 관리하고 있다. 질량 원기를 보관하고 있는 곳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세 개의 열쇠가 필요하다. 열쇠는 각자 다른 사람이 보관하고 있으며 세 사람이 모두 모이지 않으면 문을 열 수 없다. 금고를 열면 투명한 유리 용기 안에 보관한 질량 원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위원은 서로 얼굴을 확인하며 “Still there (여기 틀림없이 있다)” 라고 말하고 조심스레 금고를 봉인한 후 보관실의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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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kg을 측정하는 원기의 복제품 (출처 wikipedia)

◇킬로그램 원기에 미세한 오차 생겨

130년 동안 그 어떤 보석보다 소중하게 보관되어 온 질량 원기. 지름 39㎜, 높이 39㎜의 이 원통형 분동의 질량은 결코 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표면에 앉은 먼지를 털어내는 와중에 매우 미세한 양의 질량을 상실해 그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가장 최근에 측정한 결과 1억분의 6㎏만큼 오차가 생겨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은 질량 원기가 시대에 뒤떨어진 기준이며 다른 국제단위계와 마찬가지로 기초물리 정수에 의해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질량 원기는 현재까지 사용되는 있던 유일한 인공기준품이다. 국제단위계는 기초물리 정수에 의한 재정의 작업을 진행해왔다. 예를 들어 '미터'의 경우 원래는 질량 원기처럼 합금 미터 원기를 기준으로 삼았었지만 1983년에 299,792,458분의 1초 동안 빛이 진공 중에 이동한 거리로 재정의했다.

◇킬로그램의 새로운 기준, 플랑크 상수와 키블 저울

새로운 질량 기준을 정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과업이었다. 과학 잡지 '네이처'가 2012년 질량 정의 개정을 중력파 검출 등과 함께 가장 어려운 다섯 개 과학 실험 중 하나로 꼽을 정도였다. 아보가드로수를 활용한 방법 등 여러 가지 후보가 올라왔지만, 최종적으로 양자역학의 기본 정수인 '플랑크 상수'를 사용하여 정확한 질량을 도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플랑크 상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상수로서 그 값은 영구히 변하지 않는다.

플랑크 상수 단위에는 ㎏과 현존하는 정확한 길이 단위인 미터(m) 그리고 초(s)가 포함되는데 이들 값을 입력하면 역으로 ㎏을 정의할 수 있다. 과학계에서는 정확한 플랑크 상수를 구하기 위해 '키블 저울'을 사용한다. 이 방식은 영국 국립표준연구소 브라이언 키블 박사가 제안했다. 코일에 전류를 흘려보내면 자기장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코일에 전자기력이 일어나는 원리를 응용한다.

원리는 이렇다. 양팔 저울 한쪽에 1㎏에 해당하는 원기를 올려놓는다. 접시는 원기의 무게 때문에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저울의 다른 쪽에는 자기장의 영향을 받는 코일을 설치한다. 코일에 전류를 흘리면 바닥 방향으로 전자기력이 발생해 저울이 다시 균형을 이룬다. 이때 코일의 전류와 자기장의 세기를 측정하면 1㎏ 질량에 대응하는 전자기력의 수치를 얻을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 전자기력 수치를 이용해 1㎏ 질량에 대응하는 플랑크 상수를 계산했다. 5개국 일곱 곳의 연구소에서 측정한 플랑크 상수의 평균값은 6.62607015×10~34J·s이었다. 플랑크 상수의 단위인 J·s는 ㎏·㎡/s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터(m)와 초(s)를 알고 있으므로 1㎏을 환산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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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크 상수를 측정하는 키블 저울의 모습 (출처 wikipedia)

◇킬로그램 기준은 미래를 위한 투자

새롭게 정의된 질량 기준은 2019년 5월 20일을 기준으로 세계 각국에서 130년된 질량 원기를 대신하게 된다. 그렇다면 질량 정의가 새롭게 개정되는 순간 우리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마도 여러분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이다. 질량 기준이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체중이 변하거나 금괴의 가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도 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며 당연히 일상생활에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세계 각국의 연구실은 질량 기준을 마련하는 데 이토록 심혈을 기울였을까? 이번 작업은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18세기 미터법 제정을 위한 자오선 측정, 19세기 국제 원기 제작을 위한 합금 기술 개발, 20세기 전자파 속도 측정을 통한 미터법 제정의 등등 단위 정의는 곧 인류 과학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했다. 단위 정의로 이어지는 궁극적인 측정은 인류에게 새로운 지혜를 선물했다.

암페어, 볼트, 옴, 뉴턴, 와트… 모두 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내로라하는 과학자, 기술자의 이름이다. 자신의 이름이 단위의 명칭이 되는 것은 과학자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꿈꾸는 최고 수준의 영예이다. 이들이 활약한 나라는 예외 없이 과학 대국이며 단위 측정 기술의 수준이 기초과학력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국제도량위원회는 이번에 질량 단위 기준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전류 단위인 암페어(A), 온도 단위 켈빈(K), 화학적 양의 단위 몰(mol)을 재정의했다. 각각의 단위는 모두 기초과학상수를 기준으로 한다. 어쩌면 장래에는 단위나 측정 기기에 한국인의 이름이 붙을지도 모른다. 즐거운 상상을 하기 위해서는 기초과학에 투자해야 한다. 가까운 미래에 단위의 이름을 보유한 과학 강국 대한민국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글: 이형석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