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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은 후 vs 새 그릇이 없을 때.'

혼자 산다면, 설거지를 언제 하겠는가. 원칙있는 사람이라면 밥 먹자마자 설거지를 하겠다. 반면, 새 그릇이 없을 때 설거지를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삶의 지향점을 정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사람. 오로지 필요에 의해 마지못해 움직이는 사람.

당신은 어느 쪽인가. 전자가 많을 것으로 믿는다. 개인으로 보면 사람은 원칙을 가지고 훌륭한 처신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모이면 다르다. 이타적 개인은 어느새 이기적 군중으로 변하고, 외부의 강한 압력이 닥쳐오기 전에는 좀처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2008년 나온 '지구가 멈추는 날'은 1951년작을 다시 만든 공상과학(SF) 영화이지만, 과학 소재를 단순 흥미 위주로 다루지 않고 철학의 물음을 던진다.

키아누 리브스는 사람과 똑같은 외모를 가진 외계인 '클라투'로 등장한다. 전혀 접시처럼 생기지 않은 UFO '스피어'를 타고 온 그는 지구에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클라투를 믿지 못하는 지구인은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폭력에 노출된 우주병기 '고트'는 메뚜기떼와 흡사한 '나노봇'을 풀어 도시를 순식간에 쓸어버린다. 이스터 섬의 거대 석상 '모아이'를 닮은 무뚝뚝한 고트는 용광로에도 녹지 않는 카리스마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여기까지는 여느 SF 영화와 다르지 않다. 설정이 특이하긴 하지만 외계인의 공격은 너무 흔하다.

영화는 잠시 어느 산 속으로 장면을 옮긴다. 우주 생물학 교수 '헬렌'은 정부가 클라투를 제거하려고 할 때 그를 구해 피신한다. 고트의 지구 공격이 거세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 헬렌과 클라투는 어떤 깨달음에 도달한다.

지구인이 비록 환경을 파괴하고 지구를 병들게 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항상 극단에 몰렸을 때 파괴 행위를 멈췄다는 깨달음이다.

성경에서는 노아의 방주가 필요했지만 지구인의 어리석음이 그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UFO 스피어는 노아의 방주처럼 지구의 동물과 식물을 채집했는데, 깨달음 이후 동작을 멈춘다.

영화 '지구가 멈춘 날'은 어느 정도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표현했다. SF 영화 치고는 드물게 인간을 보는 시선이 가혹하지는 않다. 지구와 인간 자신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것도 인간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설거지를 미리미리 하면 좋겠지만 코너에 몰려서 마지못해 하는 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긴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미세먼지나 미세플라스틱, 환경폐기물로 신음하는 세상을 보면서 어쩌면 이 상황이 더 악화되기를 바라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야 인간은 자발적으로 환경을 구하러 움직일 테니까.


김용주 통신방송 전문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