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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초 한국한의학연구원 미래의학부 선임연구원

인공지능(AI)이 암을 진단하는 21세기에 한의학은 어쩌면 시대에 뒤처져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한의학 언어를 이해하고 한의학 효과에 대한 근거 중심의 연구 결과를 모두 학습한 AI가 존재하고, 이를 통해 전통 한의학의 진단과 처방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한의학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라는 소모성 논쟁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이런 상상이 한의학에서 실현되려면 선결해야 할 조건이 있다. 현대 과학 언어로 한의학의 기초 이론과 치료 기전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과거 문헌 자료에 기술된 은유와 사례, 경험치료 효과를 다양한 임상 연구를 통해 정량화 및 객관화 방법으로 입증, 의미 있는 연구 자료를 충분히 축적해야 한다.

물론 20년 남짓한 한의학의 과학화 업적을 한 세기가 넘게 과학으로 쌓아 올린 현대의학 결과들과 절대 비교를 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점은 한의학에 대한 과학 근거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켜켜이 쌓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전 진단 방법의 객관화를 모색하고 이를 통해 한의학의 치료 효과 및 그 기전을 밝히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이와 관련한 연구 결과 또한 꾸준히 축적되고 있다.

전통 한의학에서 진단은 망문문절(望聞問切)이라 하는 사진(四診) 체계를 통해 이뤄진다. 현대 기술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진단 행위는 비단 한의사뿐만 아니라 일반 의사들의 진료 행위에서도 유사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진 체계는 과학기술 발전에 힘입어 좀 더 객관화된 방향으로 진화했다.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논쟁은 잠시 접어 두기로 하자. 엑스레이,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초음파 등으로 인체를 더욱 정밀하게 관찰(望)할 수 있으며, 냄새를 맡거나 대소변을 관찰하는 행위(聞)는 현재 혈액 및 소변 검사로 대체됐다.

그러나 절(切)에 해당하는 진맥과 촉진은 앞에서 언급한 두 진단 체계와 달리 퇴화되거나 단순화 형태로 변화됐다. 특히 진맥은 오늘날 청진기나 심전도(ECG)의 심장박동변이도(HRV), 광전용적맥파(PPG) 또는 스마트 기기를 이용한 맥박 수 측정 등 의료기기를 이용한 생체신호 측정 행위로 대변할 수 있지만 이는 한의학 고유의 맥진(脈診)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현재까지 이뤄지지도 않은 상태다.

최근 한국한의학연구원 미래의학부에서는 개발하고 있는 맥진기(KIOM-PAS)를 이용해 맥진의 과학성 규명을 위해 침 자극에 따른 혈류역학 변화를 관찰한 연구 결과를 통합의학 국제학술지 'BMC 보완대체의학'에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는 20대 질병이 없는 남녀를 대상으로 요골동맥으로부터 다소 먼거리에 있는 경혈 위치인 족삼리(足三里)에 침 자극을 실시했고, 맥진기를 통해 요골동맥의 혈류량 증가를 확인했다. 또 요골동맥 맥파와 기존의 혈류역학 특성들을 동시에 측정함으로써 요골동맥 혈류 변화가 심장박출량 변화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가설에 대한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앞으로 맥진을 통해 치료 경과 평가를 객관화할 수 있는 측정 시스템 구축의 가능성도 확인했다.

이번 연구 결과만으로 맥진 원리가 규명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연구 결과가 쌓여 가고 정량화된 자료로 활용된다면 앞으로 '한의학의 AI 왓슨'을 기대하는 필자의 상상이 터무니없는 것일까.

구본초 한국한의학연구원 미래의학부 선임연구원 secondmoon@kiom.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