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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민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대학에 강연을 나갈 때마다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있다. '직지'가 그것이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직지는 고려시대인 1372년 달잠과 석찬이 백운화상의 배움을 받아 불교의 훌륭한 내용만 뽑아 적은 책이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 성경(1455년)보다 약 83년 앞선다. 필자가 인쇄를 이용한 전자부품제조 연구를 하고 있어 직지에서 느끼는 바가 특히 많다.

최근 전자부품을 신문이나 책을 찍어 내듯이 제조하는 '인쇄전자' 기술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증가하고 있다. 인쇄전자 기술은 기존 기술과 비교해 저렴하게 대면적 전자부품을 연속 제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부리거나 접을 수 있는 미래의 스마트기기 제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는 3차원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전자부품을 제조하려는 시도까지 이뤄지고 있다.

인류문화사적인 관점이 아니라 현대의 프린팅 기술을 개발하는 공학자로서 직지에 부여하는 가치는 조금 다르다. 첫 번째는 기존의 나무를 대신할 금속, 이에 적합한 잉크와 종이 가 개발됐기에 금속활자인쇄술이 인류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금속활자로 책을 값싸게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인쇄기술을 통해 정보혁명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직지의 가치를 너무 기술적인 측면으로 축소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으나 소위 '공돌이'인 나에겐 이들 가치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당시 하나의 활판으로 많은 책을 인쇄하려면 목판에 사용된 나무보다 단단하고, 썩지 않고, 변형되지 않고, 먹물도 흡수하지 않는 금속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녹여서 활자를 만들기도 쉬워야하고 굳은 후에는 줄로 다듬기 편한 첨단소재가 필요했다.

선조들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놋쇠를 이용한 금속활자를 개발했다. 그뿐만 아니다. 놋쇠로 만든 활자에는 먹물이 고르게 묻지 않기 때문에 금속활자에 적합한 새로운 먹을 사용해야 한다. 검은색을 내는 성분으로 놋쇠에 잘 붙는 그을음을 찾아냈고, 여기에 분산성과 접착성을 높이기 위해 아교와 같은 각종 첨가제를 넣은 유연묵을 개발했다.

종이 역시 '도침'이라는 공정으로 치밀도와 표면 거칠기를 조절해, 먹을 잘 흡수하면서 퍼짐성이 없는 '도침한지'를 사용했다고 한다.

프린팅 기술을 이용하여 2차원 또는 3차원 소자를 만드는 '2D·3D 디바이스 프린팅' 연구에서도 전도성, 반도성 등의 전기 특성을 띠는 소재를 합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분산성, 접합성, 인쇄성, 퍼짐성을 개선해줄 각종 첨가제를 넣은 전자잉크를 제조해야 한다. 전자잉크가 인쇄될 유연하고 투명한 기판을 개발하고, 연속적으로 대면적 정밀 인쇄가 가능한 공정 및 장비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세계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 우리 선조의 인쇄기술과 근본적으로 매우 닮았다. 3차원 구조의 전기·전자 소자 제조 3D 디바이스 프린팅 공정 역시 소재, 잉크, 공정장비 기술 측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최고의 인쇄기술을 꽃피워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했던 선조들의 DNA가 우리 몸속에 깃들어 있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에게는 세계 최고의 2D·3D 디바이스 프린팅 기술을 개발하고 세계를 선도할 가능성과 책임이 있다. 정부의 긴 안목을 가진 투자와 산업계 학계 연구계 사이의 긴밀한 협력이 더해진다면 그 가능성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그럴 때 먼 훗날 후손들이 우리의 인쇄전자기술을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정해주고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옛 선조들의 지혜를 익히고 그로부터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사이언스 온고지신'이 필요할 때다.

최영민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 youngmin@kric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