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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글로벌 기업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합당한 페널티와 혜택으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대안을 찾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글로벌 기업에 대한 여론이 밝지만은 않다. 상당수 글로벌 기업이 조세 회피, 사회 책임 회피 등 한국에서 이익만 좇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이 여전히 한국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세 회피, 특혜 시비에도 각국 정부가 글로벌 기업을 자국에 유치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글로벌 기업이 자국에 들어와 경제 활동을 하면서 투자와 고용 유발 등 순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다만 버는 만큼 쓰는지는 물음표가 붙는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되 한국에 들어온 기업이 재투자와 사회 기여를 할 수 있는 환경 마련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유한회사 감시에 한계…대안 찾아라

유한회사는 법상 공시 대상이 아니다. 투명하지 않다 보니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게 된다. 그렇다고 부작용을 막기 위해 유한회사 기준을 임의 변경 또는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부도 이러한 부작용을 인식, 유한회사도 외부 감사 대상에 포함시키는 '주식회사의 외부 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 개정안을 올해 11월 시행한다. 이 개정안이 시행되면 유한회사도 사업보고서 공시가 의무화된다. 실효성을 놓고 논란이 있지만 유한회사 지위로 공시 의무를 피해 온 글로벌 기업의 경영 투명도를 일정 부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세계 각국의 정부가 글로벌 기업을 둘러싼 논란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주요 20개국(G20)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조세 관련 금융 정보 교환(BEPS)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OECD와 G20은 국제 거래를 이용한 BEPS를 막기 위해 15개 과제를 선정하고 이행 담보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조세 협약 개정으로 조세 회피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서다.

세계가 협력하는 BEPS 프로젝트 아래에서 공동 협력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가장 현실에 맞는 대응인 셈이다.

◇격화되는 글로벌 기업 유치 전쟁…'유치' '단속' 절충점 찾아라

물론 각국의 정부가 글로벌 기업과 각을 세우는 것만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더 많은 글로벌 기업을 자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각종 유인책을 내놓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글로벌 기업은 세계 각국에 애증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이유는 명확하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 자국에 추가 일자리가 생기고, 각종 경제 유발 효과도 발생한다.

해외 기업 유치 속에서 지난해 12월 유럽연합(EU)은 한국을 조세회피처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았다. EU는 한국 경제자유구역, 외국인투자지역 등 외국인 투자 세제 지원 제도가 내국인과 외국인을 차별하는 유해 조세제도로 규정했다.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는 “EU 회원국이 아닌 국가에 EU 자체 기준을 강요하는 것은 조세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미국 정부는 최근 법인세 최고세율을 35%에서 21%로 대폭 인하했다. 이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큰 하락폭이다. 기업가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반응이 많다.

미국 정부가 세수 감소를 감내하면서까지 과감하게 법인세를 내린 의도는 여러 기업을 자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지금 당장 세수는 줄어들 수 있지만 장기로 보면 미국에 돌아오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세수 부족분을 메울 것이란 믿음이 깔려 있다.

보통 세율 차이로 인한 자본 이동 효과는 제한성을 보인다. 법인세가 낮다고 기업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시장 규모, 접근성 등 여러 요소를 종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충분한 시장성을 갖춘 미국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은 글로벌 기업과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한편에서는 글로벌 기업 모시기도 한창이다. 각국이 기업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는 가운데 기업 책임 문제를 지나치게 부과할 경우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이시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글로벌 기업이 우리나라에 더 많이 공헌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를 강제할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면서 “조세 부담이나 여러 법률의 강제성을 부여하면 가뜩이나 정체된 외국인 직접 투자가 더 경직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찬수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제도혁신연구단장은 “세계가 글로벌 기업 유치에 혈안인 가운데 우리만 글로벌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무작정 규제를 추가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면서 “기업이 한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도록 인센티브를 늘리면서도 의도성 '꼼수'를 동원하면 그에 상응하는 페널티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기업이 양질의 투자 나서도록 정책으로 유도해야

외국인 직접 투자 요소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신규 투자, 미배당 이익잉여금 재투자, 기업 간 재무 거래다. 기업 간 재무 거래는 규모가 작다. 그렇다고 신규 해외 자본을 지속 유치하는 일도 녹록하지 않다. 이미 국내에 들어온 글로벌 기업이 이익잉여금을 한국에 재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방안으로 꼽힌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외국인 투자 통계를 보면 외환위기를 겪은 후 2010년부터 국내에 유입되는 외국인 투자 금액은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외형 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이제는 내실로 우수한 투자를 유치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송영관 KDI 연구위원은 “외국 기업 투자 문제는 일자리 문제와 비슷하다. 일자리가 늘지만 저급 일자리가 느는 것은 우리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면서 “외국 기업이 우리나라에 투자하게 되면 한국 산업에는 어떤 순효과로 이어질 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이러한 고민은 아직 부족한 편”이라고 지적했다.

송 연구위원은 “현행 외국인 투자 제도를 개선해 외국인 투자가 좀 더 양질의 투자로 이어지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예를 들어 국내 연구개발(R&D) 거점을 마련하면 국내 우수 인재를 고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인센티브를 추가 지급하고, 단기성·저임금성 일자리를 만드는 정도라면 혜택은 그만큼 줄이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국적 관계없이 기업이 경영하기 좋은 환경 만들어야”

전문가 사이에선 글로벌 기업 대처 방안에서도 온도차가 있다. 그렇지만 국적을 차별하지 않는 정책 설정이 필수임에는 이견이 없다. 기업을 국적에 따라 가리는 일이 이제는 무의미하다.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다국적기업(MNE)이라는 개념을 통용하고 있다. 국내외 기업을 막론하고 동일한 혜택과 페널티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기업의 꼼수 행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강한 규제가 오히려 글로벌 기업의 조세 회피, 사회 환원 부실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글로벌 기업이 한국에 들어와서 직·간접 고용 효과를 유발한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것”이라면서 “기업에 들이대는 잣대는 국적과 관계없이 합리 수준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성 교수는 “현 시점에서는 외국 기업을 얼마나 더 많이 한국에 유치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면서 “기업이 굳이 책임을 회피할 필요 없이 안심하고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부담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영호기자 youngtig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