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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이 한창인 한 화학실험실. 갑자기 연구원 A씨의 손에 쥐어 있던 플라스크가 폭발했다. 갑작스런 폭발에 유리 파편이 튀었고, A씨는 결국 두 손가락을 잃었다. '영구 장애'가 됐지만 산업재해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A씨가 정식 연구원이 아닌 학생연구원이기 때문이었다.

사례는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이다. 학생연구원 고용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학생연구원은 고용 계약을 체결한 '근로자'가 아닌 '학생' 신분이어서 산재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연구 현장의 각종 궂은일을 도맡는 것은 물론 행정 업무에도 투입된다.

학생연구원은 연구 현장의 대표 노동 사각지대다. 이들은 신분상 대학의 석·박사 과정생이다. 그러나 공동 연구, 학위 과정, 학점 취득, 공동 실험 등 다양한 이유로 연구기관에 온다. 연구 현장에서는 해당 기관의 업무를 수행한다.

그럼에도 신분으로는 타 대학 학생일 뿐이어서 지위는 '모호'한 상태다. 근로 계약도 체결하지 않는다. 산재보험, 건강보험 등 4대 보험도 부여되지 않는다. 근로 조건도 명확하지 않다. 근로기준법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책임자 재량에 따라 일한다. '비정규직보다 못한 신분'이라는 자조가 나온다.

정부가 학생연구원 문제 해결을 위해 칼을 빼 들었다. 문제의 심각성이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학생연구원은 청년이 과학자로 성장하는 길목에서 만나는 덫이다. 이공계 석·박사 과정생은 앞으로 국가 연구개발(R&D)을 책임질 예비 과학자다. 그러나 꿈을 펼치기도 전에 좌절부터 맛본다. 부당한 처우를 개선할 대수술 없이는 국가 R&D 미래도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6일 마련한 '출연연 학생연구원 운영 가이드라인'은 당장 다음 달부터 효력을 발휘한다. 과기정통부 산하 25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은 학생연구원(기타 연수생) 1722명과 근로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학생연구원은 크게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UST) 재학생, 대학-출연연 간 학·연 협동 과정생, 기타 연수생으로 나뉜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전체 출연연에 지난해 말 현재 3979명이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정부는 파악했다. 출연연의 학생연구원 사용 규모와 비중은 최근 5년 동안 꾸준히 늘었다.

이 가운데 근로자 성격이 가장 짙은 기타 연수생부터 계약 체결을 의무화한 것이다. UST 재학생과 학·연 협동 과정생은 학위 과정상 출연연 연구 참가가 불가피하지만 기타 연수생은 말 그대로 근로를 위해 연구기관에 오는 성격이 농후하다. 이들은 이제부터 학생인 동시에 근로자로 인정받고 4대 보험, 급여, 처우 보호를 받는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기타 연수생은 출연연 차원에서 시급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우선 의무화 대상에 포함시켰다”면서 “UST 학생, 학·연 협동 과정생에 대해서도 내년 2월까지 근로 계약 체결을 권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학생연구원을 제도 틀 안에 집어넣었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가이드라인에 따라 모든 출연연은 매년 학생연구원 운영 계획을 상위 기관에 제출해야 한다. 이 계획에는 학생연구원 선발 규모·절차·기준, 연수 내용, 급여, 처우, 보호 조치가 담긴다.

학생연구원을 더 이상 제도 사각지대에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근로기준법을 현저히 벗어나는 근로 시간을 강요할 수 없다. 휴가와 적정 임금, 일반 연구원과 동등한 수준의 복리 후생을 제공해야 한다.

출연연은 또 기관 내에 학생연구원 관리 전담 조직을 설치하고 책임자를 지정해야 한다. 총괄책임은 기관장이 진다. 관리 조직은 학생연구원의 연수 계획과 연수 내용을 기록·관리하고, 연수 실적을 평가한다. 안전 교육도 책임진다.

학생연구원 노동력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도 금지된다. 연수 목적에 부합하는 연구 과제 외 다수 중복 과제에 끌어다 쓰는 것은 금지된다. 행정 업무 수행 같은 연수와 상관없는 지시는 내릴 수 없다.

제도가 정착되려면 예산 확보가 필수다. 4대 보험 가입 등 그동안 나가지 않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과기정통부는 올해 추가경정예산(추경)으로 약 20억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이 예산은 각 연구기관이 부담해야 할 4대 보험료 등 기관 부담금 충당에 쓰인다. 내년도 예산 47억원도 신청한 상태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학생연구원 인건비 역시 그동안 연구 과제 예산의 직접비에서 충당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당장 큰 재정 부담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기관 부담금을 충당하기 위해 추경 예산도 확보했다”고 덧붙였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