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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영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자력정책연구센터장

지난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유엔의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 달성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개발도상국이 어떻게 원자력발전소를 활용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국내에서는 새 정부의 대통령 선거 공약인 '탈핵' 이행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지만 원전 이용에 대한 개도국 중심의 국제 논의는 여전히 활발하다.

회의에서 케냐 대표는 원전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핵심은 2027년에 케냐 최초의 원전을 가동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케냐의 발전 설비는 약 2500㎿다. 국내에서 건설 중단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신고리 5, 6호기를 합친 용량에도 못 미친다. 케냐의 계획 실현 가능성은 얼마나 될지 의구심이 들었다.

자료를 찾다 보니 공교롭게도 우리나라가 고리 1호기를 착공하던 1971년 국내 발전 설비 용량이 딱 2500㎿였다. 당시 우리의 원전 건설을 바라보는 선진국의 시각이 지금의 필자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비록 외부 시각에서는 무모해 보이더라도 필요하고 의지가 있다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우리는 케냐를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원으로만 기억한다. 케냐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후 변화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점점 빈번해지고 극심해지는 가뭄과 고온 현상으로 농작물, 가축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발전 설비 절반을 차지하는 수력발전소의 전기 생산도 어려워지고 있다. 케냐가 원전 건설을 추진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회의장에서 선진국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던 케냐 대표의 모습에서 절실함이 느껴졌다.

고리1호기 건설을 논의하던 반세기 전 우리나라 선각자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당시 국가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총 공사비 3억달러짜리 사업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차관 조달의 어려움과 제1차 석유 파동 영향으로 무산 위기에까지 몰렸지만 성공했다.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함께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원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믿음과 절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리 1호기가 40년 동안 역할을 마치고 오는 18일 밤 12시 가동을 중단한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도 열리고, 들리는 말로는 환경단체가 이 자리를 빌려 탈핵 선언을 정부에 종용할 계획이라고도 한다.

아무리 탈핵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과하다. 마치 정년퇴임식을 장례식으로 바꾸겠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이 자리는 그동안 고리 1호기를 안전하게 운영해 온 현장의 일꾼들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여야 마땅하다.

이들은 왜 이리도 탈핵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들이 내세우는 안전하고 깨끗한 세상 구현이라는 고귀한 신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탈핵이 이뤄지면 이들이 그토록 염려하는 깨끗한 환경이 만들어질까. 환경 파괴, 오염의 주원인인 온실가스와 미세먼지가 줄어들 리 만무하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이해관계가 더 설득력 있다. 원전을 멈추면 이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많다. 정치 입지를 굳히는 환경운동가, 가스 수입업체, 늘어난 발전량으로 천문학 규모의 수익을 누릴 가스발전 민간자본 회사, 경쟁력 없는 신재생에너지 설비의 판로를 확보한 공급자,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자, 신재생 부지의 무분별한 개발로 한탕을 기대하는 부동산 투기꾼…. 생각해 보면 탈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누군가 이익을 보면 손해를 보는 이도 있는 법이다. 가뜩이나 팍팍한 생활에 오르는 전기요금까지 걱정해야 할 서민,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전기요금도 감당하기 어려운 영세 공장주. 우리 사회가 탈핵을 원한다면 이들에게 먼저 물어 봐야 한다.

다시 장면을 바꾸어 IAEA 회의장. 쉬는 시간에 내게 다가온 미국 대표가 물었다.

“한국은 정말 탈핵을 원하는가. 한국의 정치인들은 당신 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전을 주어진 예산으로 공기 이내에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나도 문득 궁금해졌다. 그들이 모르는지,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는지.

임채영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자력정책연구센터장 limcy@kae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