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가 동문 총장을 배출했다. 설립 46년 만에 처음이다. 3전 4기에 성공한 신성철 총장이 주인공이다. 신 총장은 13년 전 교수협의회 추천으로 총장직에 처음 도전한 이후 연거푸 세 차례나 고배를 마신 인물이다. 세 번 모두 해외 인사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신 총장은 “연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였는데 KAIST 은사들의 추천을 뿌리치지 못해 출마한 것이 시작이었다”면서 “돌이켜 보면 러플린 총장이 제의한 부총장직을 수락하면서 창의 연구 사업을 포기한 것이 인생의 큰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13년간 지속된 해외파 총장 시대를 끊어낸 국내파 총장으로 돌아왔다. 이런 그를 주변에서는 '준비된 총장'이라고 얘기한다. 대경북과학기술원(DGIST) 초대 총장직을 맡아 6년간 꾸려온 경험도 큰 자산이 됐다. 그는 '세계 선도대학'을 비전으로 내걸었다. 지난 15일 열린 취임식에서는 KAIST를 세계 10위권 대학에 진입시키겠다는 야심찬 포부도 밝혔다. 취임식에 즈음해 총장실에서 그가 그려 온 KAIST 세계화 전략을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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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철 KAIST 총장은 40여년 학교 역사상 최초로 탄생한 동문 출신 총장이다. 그는 4년 임기동안 융합인재 양성과 교육, 기술사업화 강화로 세계를 선도하는 KAIST를 만들기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KAIST는 지금 성장과 퇴보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과학기술 대변혁 물결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고 연구개발(R&D)을 선도해 우리의 존재가치를 세계무대에 알려야 합니다.”

신성철 총장은 KAIST의 가치로 '선도성'을 꼽았다. 우리나라 이공계 인력양성과 기술개발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으면 KAIST의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신 총장이 '글로벌 가치창출을 위한 세계 선도대학'을 새로운 비전으로 정한 배경이다.

이어 그는 세계를 선도하기 위한 KAIST의 조직 문화 키워드는 세 가지로 요약했다. '융합'과 '협업', 그리고 '배려'다. 그는 “이 가운데서도 특히 '배려'는 KAIST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필요한 굉장히 중요한 자본”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한 조직개편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최근 간단한 변화를 꾀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직보다 분위기 변화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 총장은 “조직은 아무리 바꿔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면서 “조직원들은 가슴이 뛰어야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이를 위한 수평사회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KAIST 학생들은 세계를 향한 리더가 돼야 합니다. 한국이라는 좁은 땅에 머물지 말고 세계를 이끄는 리더가 되도록 키워야 합니다. 2017학년도 입학생들에게도 큰 꿈을 갖고 하버드·캠브릿지 대학 총장, 구글·IBM CEO를 목표로 공부하라고 말했습니다.”

신 총장은 KAIST 세계화를 위해 'KAIST 글로벌 리더십센터'를 설치하기로 했다. 학생들의 글로벌 역량을 배양하기 위한 포석이다. 이곳에서는 각종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리더로서의 마음가짐 등을 교육하고 세계를 이끄는 리더 초청 강연도 실시할 계획이다.

리더십 교육은 KAIST 학생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개방해 전국의 전문인력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육성할 예정이다.

전임 총장이 추진했던 개혁 가운데 효과적인 것은 계승 발전시킬 계획이다. 서남표 총장의 주요 업적인 영어강의와 교수 영년제(테뉴어시스템)가 대표적인 사례다. 테뉴어시스템은 교수도 어느 정도 단계를 거쳐야 정년을 채울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KAIST가 오래전부터 실시해 오던 것을 서남표 총장이 외부에 널리 알렸다.

영어 강의는 절충형으로 보완해 실시할 계획이다. 외국인 교수나 학생이 모두 강의에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신 총장의 지론이다. 이를 위해 강의 전에 우리말로 먼저 개요를 설명한 뒤 영어로 강의하고 마지막에는 또다시 우리말로 요약 설명하는 방법으로 진행한다.

신 총장은 “캠퍼스에서 영어로 소통하지 못하면서 세계 선도대학을 지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면서도 “하지만 영어 때문에 교육이 희생돼서는 안된다. 우리말로 서머리하고 강의 내용을 별도의 영상물로 만들어 복습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등 보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 총장은 '선도성' 확보 방안으로 '강한 융합 연구'를 제시했다. 융합 인재는 그가 KAIST 학생을 글로벌 인재로 양성하기 위해 중시하는 세 가지 인재상 가운데 하나다. 그는 '융합 인재'와 함께 초연결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협업'과 과학자로서 갖춰야 할 '윤리의식'을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할 덕목이라고 했다.

“하나의 전공분야에 치중하는 것도 중요하고 가치 있지만 여러 학문 분야에서 소양을 갖출 때 융합연구에서 더욱 두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기업에서도 다른 사람과 협업할 수 있는 기초가 튼튼한 인재를 배출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무학과제는 이런 융합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방편입니다.”

신 총장이 DGIST에서 성공을 거둔 '무학과제'를 KAIST에 도입하려는 것도 융합 인재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물리, 수학, 화학, 생물 등 기초과학 소양을 갖추고 컴퓨터 코딩, 통계, 엔지니어링과 같은 기초 공학을 공부해야 향후 융합 연구에서 임팩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다”면서 “전공학과 없이 여러 학문을 공부하는 무학과제는 효과 높은 대안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는 무학과제를 KAIST에 도입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게 시작할 예정이다. 그동안 KAIST를 지탱해 온 교육프로그램이 따로 있고 교수와 학생들의 취향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은 오는 6월말까지 기본 프로그램을 마련해 내년 신입생부터 적용할 방안을 모색한다. 이어 향후 4년간 진행할 융·복합 트랙과 교재도 개발할 계획이다.

내년 신입생부터 무학과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올해는 준비에 만전을 기할 예정이다. 물론 특정 학문에 뜻을 둔 학생은 기존 방식대로 2학년이 되면 전공을 선택하도록 자율성을 부여한다. 무학과를 선택한 학생에게는 기초 과학기술분야 소양 교육을 포함한 통섭교육을 실시하고 3학년 이후부터 전공 심화과정을 배울 수 있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사실 신 총장에게 무학과제는 이미 DGIST에서 검증한 프로그램이다. 그는 “DIGIST에서 2014년에 처음으로 무학과 학생을 모집했는데 200명 모집에 1815명이 몰려 9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고, 올해는 약 2330명이 지원했다”면서 “학생들의 교육 만족도는 매우 높은 편”이라고 소개했다.

“세계 유수의 대학들을 앞지르고 세계 10위권에 드는 글로벌 선도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 수준의 연구그룹을 적어도 10개는 확보해야 합니다. 융합 인재를 토대로 융·복합연구 시스템을 확대해 이뤄 나갈 계획입니다.”

신 총장은 출연연과 협력하는 상생연구 활성화 방안도 모색하기로 했다. 교내 인력과 여러 출연연 인력이 함께하는 융·복합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식이다. 프로젝트 결과 능력을 인정받은 연구원에게는 겸직 교수 자리도 제공할 방침이다.

신 총장은 “프랑스 CNRS 국립과학원이나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인근 대학과 공동연구하거나 겸직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생활화 돼 있어 더 큰 시너지효과를 낸다”면서 “KAIST는 기초연구에 강하고, 출연연은 상용화 연구에 강한데다 오랜 기간 연구로 닦은 관련 분야 노하우가 많아 융합 연구로 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말했다.

신 총장은 “KAIST가 앞으로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선도적으로 나서야 글로벌 선도대학 위상을 갖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연구나 논문, 교육에만 치중하느라 글로벌 선도대학으로 가는데 장애가 많았다는 진단이다. 이에 그는 기존 R&D 모델에 '비즈니스'를 추가한 'R&DB'를 육성하기로 했다.

“글로벌 가치창출이 꼭 연구와 논문에 집중될 필요는 없습니다. 영향력 있는 기술로 사업화를 실현하고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면 그것 역시 KAIST의 가치를 지키고 선도성을 확보하는 길입니다.”

신 총장은 KAIST 기술을 적극 사업화하면 '콜마'와 같은 대박 신화를 재현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다. 콜마는 지난해 매출 1조원을 달성한 대덕연구개발특구 연구소기업 1호다. 신 총장은 “콜마는 한국원자력연구원 기술을 바탕으로 소위 대박 성공을 이뤄내지 않았느냐”면서 “KAIST가 개발한 무궁무진한 각종 기술을 사업화 하면 막대한 경제성과 역시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술출자기업'을 제시했다. 2000년대 초 기술만 갖고 벤처창업에 몰렸다가 대부분 실패한 아픈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복안이다. 교수와 학생은 개발한 기술을 투자하고 자금과 운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형태로 연구소 기업을 창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 창업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기업가 정신'을 비롯한 교육 과정을 개설해 학생이 기업가로 거듭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안도 모색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다시 한번 벤처기업 활성화를 꾀해 보자는 취지다.

“학생 창업은 기초 공부를 확실하게 한 뒤에 해야 합니다. 절대 공부에 실패해서 창업을 선택하면 안됩니다. 창업은 확실한 아이템을 갖고 도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학생 창업에 조건을 달았다. “창업을 하면 사업에 올인해야 합니다. 특히 기술 창업을 하려면 반드시 경영 전공자와 함께 공동 창업할 것을 권합니다. 그래야 창업정신을 잊지 않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경영철학도 갖추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 벤처 창업이 융성했지지만 지금은 대부분 성장동력을 상실, 이름만 남거나 별다른 활동을 못하는 기업이 90% 이상”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신 총장은 앞으로 KAIST 기술을 활용한 기술출자기업, 교수 및 학생 창업 기술들이 많이 나와 제 역할을 한다면 국내 기업 환경의 건전성을 확보하고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3년 전에 총장이 됐으면 허우적대다 끝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겪어온 실패와 DGIST를 돌아서 온 13년간의 여정이 나를 한층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인맥을 활용해 국가와 KAIST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성철 총장은 “46년 만의 첫 동문 출신 총장이라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겁다”면서도 “KAIST가 세계 10위권 대학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봐 달라”고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대전=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