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 CF에 디지털이 `돼지털`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16년 전이다. 디지털 시대 이전을 아날로그 시대라 부르지만 당시엔 아날로그인지도 몰랐다.

분명한 것은 디지털이 등장하면서 정보기술(IT)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변화의 속도가 빨라졌다. 디지털은 새롭고 빠르며 다양했다. 단순히 버튼을 누르고 대화를 주고받던 무전기도 예외는 아니다. 디지털 무전기 시대가 도래했다. 세계는 이미 미국과 유럽을 선두로 디지털 무전기 시대로 넘어갔다.

미국, 중국, 일본, 유럽연합(EU)은 인증까지 마치고 실제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 미국은 2011년 1월, 중국은 2012년 1월부터 각각 아날로그 인증을 중단했다. 유럽은 자체 개발한 디지털무선통신(DMR) 방식을 국제표준으로 마련, 디지털 무전기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정부 정책이 디지털 무전기 전환을 견인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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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무전기 시대 개막

우리나라에서도 2014년 7월 무선설비 기술 기준 및 주파수 배분 고시 개정안을 시행하면서 디지털 무전기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에 따르면 2016년부터 기존의 광대역(25㎑폭) 아날로그 무전기 무선기기 적합 인증이 중단됐다. 무선국 허가·신고 접수도 내년까지만 받기로 했다. 아날로그 무전기는 2018년까지만 신제품이 나오는 셈이다. 2008년 디지털 무전기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된 이후 6년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산업통신용 초협대역 디지털 무전기를 국내 시장에 확대하고 주파수 이용을 효율화하기 위해서다.

미래부 관계자는 15일 “국내 간이 무선국과 산업용 무선국 수요는 약 30만으로, 채널 수가 부족해 혼신이 잦다”면서 “디지털 전환을 통한 주파수 이용 효율화가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산업통신용 초협대역 디지털 무전기는 경찰·소방·교통사고·철도·재난 등 현장 상황을 그룹통화와 일대일, 중계 통신을 할 수 있다. 기존 디지털 협대역 819개 통화 채널을 초협대역과 함께 사용이 가능하다. 주파수 이용 효율을 2배 높여 통화 채널이 1638개로 늘었다. 경찰, 소방, 산불감시, 재난 업무 등 공공 분야와 민간 사업장에서 62만여명이 혼신이나 간섭없이 주파수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디지털 무전기 교체 물량 잇따라

국내 무전기 시장은 2013년 410억원에서 매년 7.8% 증가, 2016년 512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아날로그 무전기 생산 중단 시점이 다가오면서 공공 분야를 중심으로 디지털 무전기 도입의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군 역시 육군 정보화기획실 중심으로 DMR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아날로그 허가 종료 시점에 맞춰 무선통신 장비 대부분이 DMR로 교체될 예정이다.

경찰은 기존의 테트라(TETRA) 방식을 유지하되 교통과 방범 등에 쓰이는 아날로그 무전기는 디지털로 교체할 것으로 보인다.

민간에서도 2013년 이후 점차 전환하고 있다. 대형 건설사에서도 아날로그 제품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디지털개인무선통신(dPMR)` 무전기 전환을 검토하고 있다. 하청업체 교체까지 고려, 아날로그 종료 시점 직전에 교체 물량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시장은 외산 차지

그러나 국내 시장은 공공 분야를 중심으로 외산 일색이다. 국방과 민수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조달청 무전기 발주 규모는 120억원 수준이다. 이 가운데 약 40억원 규모의 디지털 무전기 전량을 모토로라와 중국 하이테라가 가져갔다. 국산 DMR 제품이 출시되지 않아서다. 조달청에서 제시한 입찰 조건을 맞추지 못해서다. 업계 측은 제품 사양 자체가 고급형 기준이어서 국내 업체가 참여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암호화와 위성항법장치(GPS) 등 부가 기능 개발이 더딘 탓이다.

올해는 디지털 무전기 발주 비중이 전체 물량에서 60%로 늘어날 전망이지만 상황은 다르지 않다. 국내 업체가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다. 2018년까지는 아날로그 물량이 남아있어 버틸 수 있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게다가 아날로그 물량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국내 제조 경쟁력 뒤처져

디지털 무전기 제조 경쟁력은 선진국에 비해 뒤처진다. 글로벌 기업 하이테라를 보유한 중국에 비해서는 모자란다. 업체 대부분이 영세, 기술력은 선진국 대비 80% 수준이다.

국내 무전기 제조업체들은 2014년 `아날로그 육상 이동용 무선기기`를 뜻하는 랜드모바일라디오(LMR) 업체 모임 `LMR 무선기기산업 협의회`를 구성, 공동 대응하고 있다. 유니모테크놀로지, 에어텍, 위너텍 등 9개 업체다.

그러나 디지털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협의회 회원사도 12개에서 9개로 줄었다. 남은 업체들은 직접 돈을 써 가며 제품 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쉽지 않다.

물론 제품은 있다. 개발이 다소 쉬운 dPMR 제품은 현재 5개 제조업체가 공급하고 있다. DMR 제품은 4개 업체가 개발하고 있다. 올 상반기 중에 제품을 선보일 전망이다.

DMR 장비는 대기업과 산업 현장 등 업무 범위가 넓은 일반 무선국에 주로 쓰인다. 반면에 일반인과 소규모 매장 등 전체 무전기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간이무선국에는 dPMR 기술이 적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DMR 대비 적은 비용으로 단말기를 제작할 수 있다. 국내 업체들이 dPMR 장비 개발에 한창인 것도 이 때문이다.

◇국산 디지털 무전기 산업 성장 환경 마련돼야

국내 제조업체 중심으로 디지털 무전기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현재 상황으로는 국내 업체가 조달청 발주에 참여조차 어렵다. 게다가 2018년 아날로그 무전기 허가 종료 시점을 앞두고 올해와 내년에 공공기관 중심으로 대규모 발주가 잇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자칫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디지털 무전기가 전량 외산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짙다. 아날로그 무전기는 국내 조달 입찰 조건에 `국내 직접 생산` 항목이 있어 국내 업체에 유리했다.

LMR협의회 관계자는 “연구개발(R&D)도 중소기업이 직접 주도하는 상황이지만 정부 측 배려는 전혀 없다”면서 “직접 생산 조항을 넣으면 외산 업체도 국내 투자를 고려, 일석이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2018년이면 선진국 수준을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다”면서 “기술력을 갖출 때까지 정부의 자금 지원 등 필요한 환경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창선 성장기업부(구로/성수/인천) 기자 yud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