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억 컴퓨팅 기기와 맞물린 인터넷은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도구다. 사회 모든 분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터넷 주소 체계를 관리하는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의 권한도 그만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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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NN은 도메인과 인터넷 주소 할당 등 인터넷 세계의 핵심 기능을 담당한다. 한 나라나 기업을 인터넷에서 사라지게 하긴 어렵지만 특정 국가에 유리한 인터넷 정책을 펴는 것은 가능하다. 도메인 선정 과정에서 입김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

인터넷 거버넌스가 화두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인터넷 거버넌스는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아우르는 인터넷 사회구조의 총체적인 관리체계와 지배구조를 뜻한다. 유럽연합(EU)과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세계 곳곳에서 미국 중심 인터넷 체계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특히 미국 국가안보국(NSA) 대규모 인터넷 감시 파문 이후 새로운 인터넷 거버넌스가 국제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인터넷 체계 개편 요구 거세다

대표적인 미국 도·감청 행위 피해자인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브라질과 유럽 사이에 해저 광케이블을 연결하자”고 제안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미국 감시 없는 유럽 전용 통신망을 논의했다.

EU는 최근 미국의 인터넷 영향력을 축소할 수 있는 정책 초안을 마련했다. 미국이 가진 최상위 도메인 할당 권한을 축소하고 ICANN의 운영을 개편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ICANN의 완전한 세계화’가 목표다. EU는 정책 초안에서 “대규모 감시와 첩보활동으로 인터넷과 거버넌스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며 “인터넷은 독자적이고 자유롭게 개방된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브라질과 EU 외에도 국제 사회에서 인터넷 거버넌스 재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NSA의 정보 감시를 폭로한 게 결정적 계기다. 스노든은 인터넷 거버넌스 재편 논쟁에 기름을 끼얹었다.

미국의 인터넷 영향력에 대한 우려가 처음 제기된 시기는 1990년대 후반이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미국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중국, 러시아, 중동에서 ICANN의 인터넷 주소 통제권에 불만을 제기했다. 2011년 ICANN이 새 인터넷 주소 정책을 독단 처리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2012년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규약 개정 시에는 미국·서유럽과 러시아·중국·브라질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ITU의 통제 권한에 인터넷을 포함시키는 게 개정안의 핵심이다. EU는 스노든 논란 이후 미국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돌아섰다.

◇인터넷 거버넌스 왜 달라져야 하나

인터넷 체계는 사용자와 서비스 공급업체, 표준기구, 도메인 등록과 등록대행 기관, 지역 인터넷주소(IP) 할당 기구 등으로 구성된다. 1998년 미국 상무부와 양해각서를 근거로 설립된 ICANN은 도메인 관련 최고 국제기구다. 도메인 네임과 주소 할당 등 인터넷 정책을 수립하고 관리한다.

민간 기구로 미 상무부에서 권한을 이양받았지만 미국이 ICANN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이사회는 다국적 출신으로 구성됐지만 미국인이 상당수다. 미 상무부는 ICANN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레너드 G. 크루거 미국 의회조사국 과학기술정책 전문가가 작성한 ‘인터넷 거버넌스와 도메인 네임 시스템 의회 이슈’ 보고서에 따르면 미 정부는 상무부와 통신정보관리청을 통해 ICANN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어느 나라 정부보다 큰 영향력을 가졌다는 설명이다. 2009년 체결한 의무협약을 비롯한 3가지 개별 계약이 근거다.

크루거 전문가는 “ICANN이 내리는 결정 중 상당수는 지식재산과 프라이버시, 사이버보안 등 다양한 분야의 인터넷 정책에 영향을 미친다”며 “미 정부의 권한과 통제력은 오랜 기간 국제적 반감의 대상이었다”고 설명했다.

최근 진행 중인 신규 일반 최상위 도메인(gTLD) 선정 과정을 보면 미국와 ICANN의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다. ICANN은 인터넷 성장에 따라 ‘.com’이나 ‘.net’ 같은 gTLD 확대를 위해 1930개를 신청 받아 검토 중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유럽 국가의 기간산업 관련 도메인은 ICANN의 반대에 부딪혔다.

◇美, 기득권 쉽게 놓지 않을 듯

각국은 표면적으로 ‘다중이해관계자(multistakeholder)’ 모델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 거버넌스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인터넷에 이해관계가 얽힌 다양한 기관과 기업, 시민단체가 협의하고 협력하는 체계다.

이해관계자 사이에 탄탄한 신뢰가 필요하다. 상설협의체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반면에 정부가 힘을 갖고 ITU 같은 정부 간 기구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아직까지는 어떠한 구체적 방향도 마련되지 않았다.

현재 인터넷 거버넌스 논쟁은 미국과 EU, 브라질과 중국, 러시아 등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더 크게 보면 미국 주도와 국제기구 주도의 인터넷 거버넌스 싸움으로 나눌 수 있다. 2012년 9월 우르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서 미국은 인터넷 관리의 세계화를 핵심으로 하는 ‘몬테비데오 성명’에 동참했다. ICANN 주도 인터넷 거버넌스 체계의 변화 필요성에 동감한다는 의미다. 반면 그해 말 열린 ITU 회의 때는 서명을 하지 않으면서 ITU 역할론에는 반대를 표했다.

UN 산하 국제기구인 ITU는 1국 1표 방식으로 운영된다. 미국은 인터넷 이슈는 ITU에서 다룰 사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치나 국가 권력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태계 마련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다른 국가에서는 미국이 결국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수작이라며 비난했다. 국가별로 1표를 갖게 되면 미국의 영향력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EU 역시 ITU 역할론에는 반대하지만 미국 중심 거버넌스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EU 집행위원회는 미국의 인터넷 영향력 축소를 위해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정책 제안에 나선다”며 “ICANN 기능 분산을 위한 구체적 절차와 일정도 논의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러시아는 인터넷 도메인을 각국 정부가 관리할 것을 주장하며 미국을 견제했다.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 인터넷 후발국은 인터넷을 ITU 관할 영역에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고수한다. 오는 4월 브라질에서 열릴 ‘인터넷 거버넌스의 미래 다자간 회의’에서 얼마만큼 구체적 결론이 내려질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블룸버그는 “올해는 인터넷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해가 될 것”이라며 “다중이해관계자 모델이나 정부 간 영향력 강화 모델 등에 대해 국가 간 합의가 이뤄지느냐에 따라 인터넷의 발전 방향이 달라질 것”이라고 전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